목도삼매
2010년 4월 16일 by 김 승엽Tweet
목도삼매 (木刀三昧)
연재했던 1편 부터 7편까지의 내용을 종합해 퇴고를 거친 1차 완성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몸을 일으킨 준태는 어깨를 천천히 돌려 보았다. 오십 견으로 평소에 삐걱거리던 어깨가 밤새 잠을 잘 못 잤는지, 자고 일어났더니 뻐근하게 무겁다. 침대에 앉아 어깨를 풀어주다가 문득 아랫배로 눈이 향한다. 뱃가죽이 접혀 손잡이 마냥 잡기 좋게 튀어나와 있는 아랫배를 잡고 흔들어보니 뱃살이 출렁거린다. 삐걱거리고 망가져가는 몸이 이제 나이를 속일 수 없게 되었음을 새삼 느끼게 했지만, 그렇게 앉아 세월의 무상함과 자신의 게으름만 탓하고 있을 만큼 아침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준태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출근을 준비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침이 익숙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먼저 침대를 정리하고, 옷장에서 입고 나갈 옷을 꺼내 놓은 뒤, 침실을 나와 커피를 내리고 식빵 두 조각을 토스터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식빵이 구워 질 사이 샤워를 하고 나와서 딸 방에 노크를 한다.
“혜인아! 학교 가야지!”
이제 대학교 1학년인 딸 혜인은 고3의 중압감에서 해방되자 처음에는 꽤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을 묶어두던 줄들이 하나 둘 풀어지자 지금은 그런 자유들을 만끽하느라 귀가가 늦는 일이 잦아졌다. 입시 준비를 하면서 보살펴주는 어미도 없을 뿐더러 아비는 입시 스트레스를 받아 줄 만큼 녹록한 사람이 아닌 덕분에, 혼자 삭이고 고생했던 딸이 안쓰러워 요사이 늦게 들어오는 것 정도는 이해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좀 심한 것 같아 오늘 아침에는 한 마디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토스터에서 식빵을 꺼내놓고 다른 식빵을 집어넣은 뒤, 방으로 들어가 옷을 차려 입고 나오면서 딸 방을 확인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방에서 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 일어나냐?”
달걀 프라이를 하면서 혜인의 방을 향해 소리치자 그제서야 핫팬츠에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셔츠 차림으로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오늘은 오전 수업 없는데…….”
“인마! 그럼 일찍 일어나서 아침 준비 좀 하면 안되냐? 아빤 출근 준비하느라고 바쁜데!”
잠이 가득한 딸의 얼굴을 보며 준태가 달걀 프라이가 담긴 접시와 우유팩을 식탁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먹고 이따 나가기 전에 세탁기 좀 돌려라.”
“네.”
혜인이 억지로 빵을 입에 가져가며 대답하자 준태도 앉아 빵을 먹기 시작했다. 우유 대신 커피를 곁들여 빵을 먹고는, 남은 빵 한 조각을 입에 가져가는 딸에게 말했다.
“요즘 너무 늦는 것 같더라.”
지금까지와는 달리 낮고 느린 준태의 목소리에 혜인이 금세 그것이 경고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뭔가 변명을 해야 했지만 달리 생각이 나지 않는지 아니면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냥 아무 말 없이 준태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은 아빠보다 일찍 들어와 있었으면 좋겠다.”
“네.”
준태는 혜인의 대답을 듣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와 커피잔을 싱크대에 집어넣고는 현관으로 향하며 말했다.
“아빠 먼저 나간다. 학교 잘 다녀와라.”
“다녀오세요.”
혜인의 인사를 듣고 집을 나선 준태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안 그래도 시간이 빠듯한데 출근하면서 차에 기름까지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늦지 않고 회사에 도착하자 책상 위에 못 보던 상자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뭐죠?”
준태의 물음에 PC 모니터를 들여다 보던 이주희 대리가 일어서 책상으로 다가왔다.
“한 10분 전에 택배가 왔었어요. 부장님 앞으로 온 거라기에 제가 대신 받았는데 뭔지는 모르겠는데요.”
“그래요? 뭐지?”
준태는 고개를 갸웃하며 탁자 위의 편지 칼로 묶인 줄을 끊고 상자를 풀었다.
“어머! 바둑판이네.”
이주희 대리가 상자 안을 먼저 확인하고 놀랍다는 듯 작게 소리쳤다. 안에는 바둑판이 들어있었다. 두께가 두 뼘은 되어 보이는 바둑판을 상자에서 완전히 꺼내느라 애를 좀 먹었지만 꺼내 놓고 보니 꽤 비싼 물건인 것 같아 누가 보낸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상자 안에는 보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쪽지 같은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상자에 붙어 있던 택배 스티커를 살펴보니 보낸 사람이 이도진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도진이 누구지?’
이주희 대리는 상자에서 바둑판이 나오자 신기한 듯 바둑판을 들여다보다가 준태가 상자를 살펴보는 사이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는지 바둑판 옆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그런데 여기 왜 이럴까요?”
이주희 대리의 물음에 준태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금, 아니 금이라고 하기에는 그 직선에서 인공적인 냄새가 나는 바둑판의 몸체를 절반 정도 파고 들어간 균열이었다. 그 균열은 마치 바둑판을 톱 같은 것으로 자르려다 그만 둔 것처럼 바둑판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나 있었다.
“아깝네요. 이게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택배로 오다가 생긴 걸까요?”
바둑판의 균열을 보느라 준태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이대리는 자리로 돌아갔다. 준태는 다시 상자를 살펴보다 이름 외에는 보낸 이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상자를 접어 한 쪽에 치워두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반쯤 잘린 바둑판을 잠시 바라보며 이도진이 누구이며, 왜 보냈는지 떠올려 보았지만 짐작 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바둑판을 책상에서 내려 놓고 어제 보다만 기획서들을 펼쳐 놓고 PC를 켰다. 잘못 배달된 물건이거나 혹은 그게 아니라도 누구에겐가 연락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다만 그 사이 입사 동기인 박부장이 찾아왔다가 바둑판을 발견하고는 혀를 차며 아까워했을 뿐이었다.
“누가 몹쓸 짓을 했구먼, 어째서 저래 놨을고……”
박부장은 점심시간 때까지 바둑판을 들여다 보다가 돌아갔다. 준태는 바둑에 흥미가 없어 잘 몰랐지만 아무래도 박부장이 저러는 것을 보니 꽤 귀한 물건인 것 같았다.
“부장님! 식사하러 가시죠.”
김과장의 말에 태준이 어 그래요 하고는 양복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막 집어들 던 휴대전화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먼저 나가요. 나 전화 받고 바로 따라나갈 테니까.”
준태는 기다리던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이준태 입니다.”
“바둑판은 받으셨습니까?”
“아! 네. 그런데 어디시죠?”
어디냐는 물음에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바둑판을 잘 보셨습니까?”
상대가 묻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상대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것이 조금 불쾌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통화를 길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준태의 말에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제야 아까 상자에서 찾아냈던 이도진이란 이름이 떠올랐지만 자신을 밝히지 않는 상대의 수수께끼 같은 물음이 잠시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잠시 발 밑에 놓인 바둑판을 바라보다가 점심식사를 하러 사무실을 나섰다.
근처의 식당에서 부하직원들과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 전화와 바둑판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건 전화를 받는 곳은 “일마레”라는 커피숍이었다. 이렇게 되니 누군지 알 수 없는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전화는 그가 바둑판에 대한 것을 겨우 잊고 퇴근을 준비하던 때 걸려왔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전화를 받자 마자 상대방이 꺼낸 말이었다.
“바둑판도 돌려드려야 하니 뵙지요.”
아마 다른 때라면 준태가 상대방의 요청을 따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엔 호기심과 어떤 예감 같은 것이 그를 승낙하게 만들었다. 이번에 거절해도 그는 만나줄 때까지 계속 전화를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가 퇴근하시는 시간에 맞춰 회사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상대는 이번에도 자신의 말을 마치자 마자 전화를 끊었다. 자신의 전화번호와 회사까지 알고 있는 상대에 비해 자신은 상대방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준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 시간 뒤, 준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창 아래 건물 입구 쪽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무례한 전화 예절 때문일까? 이상한 불안이 그를 엄습한다. 예전에 아내의 위독을 알리는 전화를 받기 전처럼 손이 떨린다. 무슨 일일까? 누구일까? 신경이 날카로워져 시간이 더디 가는 것을 피하려고 일부러 모니터를 바라본다. 길게 늘어선 숫자들에 스스로를 유배시킨다.
퇴근 시간에서 40분 정도가 지나서야 준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둑판 위에 평소에 들고 다니는 얄팍한 서류가방을 올려놓고는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를 타고 회사 정문 앞으로 나와 주위를 살폈다. 혹 낯익은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밖으로 나가 기다리려는 찰라, 누군가 조수석 창을 손으로 두드렸다.
창을 내리자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캐주얼 정장 차림의 남자가 안경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게 뻗은 코와 거뭇한 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십 대 후반 어쩌면 삼십 대 초반 정도, 검은색 뿔 테 안경이 그의 각진 턱과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태 부장님 이시죠?”
“네. 혹시 이도진씨 인가요?”
준태의 물음에 남자는 대답 대신 차에 타도 되겠냐는 듯한 손짓을 했다. 준태가 타세요 하고 대답하자 마자 남자는 차에 올라탔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왜일까? 그의 목소리에서 흥분이 느껴진다. 왠지 설렘 같은 것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다.
“아뇨. 그보다 먼저 누구시고 왜 바둑판을 보내셨는지 알고 싶은데요.”
불쾌함을 섞어 흘려 보냈지만 상대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바둑판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물으면 물을수록 질문이 늘어나는, 준태가 싫어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제 이름은 이도진 입니다. 그리고 저 바둑판은 제가 벤 거구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단 거요? 저 바둑판을 당신이 벴건 썰었건 내 알 바 아니니 들고 내리시오. 난 필요 없는 물건이니!.”
음성이 높아지자 도진이 준태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지리산 화엄사 근처에서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사선으로 반쯤 잘려 있지요. 꽤 오래 전에 잘렸는지 이제는 나무껍질만 묘하게 일그러져서 잘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진의 말에 준태가 소리쳤다.
“젊은 친구가 이상한 소리만 계속 하는군. 난 모르는 일이니 어서 내리시오. 바쁘니까!.”
준태가 이렇게 말하고는 트렁크를 열고 차에서 내려 바둑판을 길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열자 도진이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리더니 바둑판 위에 앉아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준태에게 말했다.
“그 나무를 벤 사람이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남자의 마지막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준태는 서둘러 차를 몰아 도진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선명하던 흥분과 화는 이제 놀라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신도 처음에는 기억하지 못했다. 지리산 화엄사. 도진이란 남자의 입에서 그 두 단어가 흘러나온 순간, 준태는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먼지 쌓인 창고 구석에서 꺼낸 오래된 앨범처럼, 미화되고 희미해진 단편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 일들을 떠올린 순간, 준태는 남자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부정하고 달아나야만 했다.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리고 위험을 감지하는 어떤 감각이 그를 조종했다.
옛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는 사이 어느 새 그는 집에 도착해 있었다. 혜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준태는 식탁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바둑판을 벤 그 도진이란 남자가 어째서 지금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 호기심이 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준태는 의자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옷장을 열어 안쪽 구석에 세워놓은 목도를 꺼내 보았다. 검은색 천을 걷어내고 손으로 훑은 뒤 오른손으로 잡아본다. 목도 끝에 느껴지는 무게 감. 어깨가 살짝 쑤신다. 이 목검을 다시 꺼낸 것이 얼마 만인지 준태는 떠올려 본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밤 늦게 술에 취해 들어온 그 앞에 아내가 나타났다.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연애시절 즐겨 입던 분홍색 원피스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준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술기운에 실감이 나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뗄 수 있었다.
“왜 안자고 나와 있어?”
“여보 나랑 같이 가요.”
그 순간 술이 확 깨며 그녀의 혼령이 나타난 것을 알아채고는 기겁했다. 무슨 한이 남아 저러나 싶어 다가가자 그녀의 모습은 이내 사라졌다. 그 뒤로 아내는 매일 밤 나타났다. 침대 맡에 있기도 하고 꿈에 나타나기도 했다. 언제나 같이 가자며 손을 내밀었고 준태는 혜인이를 남겨두고 같이 가자는 아내가 야속하기도, 애처롭기도 했다. 필시 갑자기 맞은 죽음에 이 세상에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매일 밤 나타나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몸이 축나기 시작했다. 살이 8 킬로그램이나 빠지고 볼이며 눈가가 패이기 시작할 때 준태는 벽장의 목도를 떠올렸다. 벽조목으로 만든 목도니 귀신을 막아줄 것 같았다. 예전 할머니가 잠자리가 뒤숭숭하면 머리맡에 식칼을 두고 주무시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목도를 머리맡에 두고 자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준태는 목도를 꺼내 만져보기만 하고 다시 옷장 안에 집어 넣었다. 몸은 괴로워도 아내를 쫓아내는 것 같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알아챘는지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며칠 뒤 마지막으로 나타나 눈물을 흘린 뒤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 후로 다시 꺼내 보지 않던 목도를 다시 꺼낸 것은 역시 도진이라는 남자 때문이었다. 도진은 그가 이 목도를 손에서 놓지 않던 때의 일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한 때, 그는 검을 배운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그것은 하나의 종교, 그리고 모험, 또 다른 인생의 길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집 안의 어려움으로 괴로워하던 그에게 검은 정신을 가다듬고 안식할 수 있는 도피처였다. 그러나 그것은 파고 들수록,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 되어 그를 사로 잡았다. 그리하여 대학 입시에 실패 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목도를 부러뜨리고 깎고 또 부러뜨리고, 엄지와 손바닥의 굳은 살이 몇 번 벗겨졌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한 때였다. 지금은 그저 아랫배 나온 아저씨일 뿐 이었다. 준태는 옷장에 목도를 집어 넣고 옷을 갈아 입었다. 쌀을 씻어 전기 밥솥에 안치고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 차려 놓은 뒤에 찌개를 끓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녁을 준비하고 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대신 시끄러운 랩 음악이 한 동안 울렸지만 혜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먼저 저녁을 먹은 뒤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식사 후의 나른함과 피로 덕분에 소파에 가로 누워 졸고 있는데 위~잉 하고 휴대 전화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늦는다는 혜인으로부터의 문자 메시지와 한 개의 부재 중 통화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밥 먹는 동안 왔던 모양인데 처음 보는 전화 번호였다. 처음에는 광고 전화 인가 생각하다가 문득 도진이 떠올랐다. 그의 전화라면 받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때 준태의 휴대 전화가 다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방금 전의 그 전화번호, 잠시 휴대전화를 내려보다가 배터리를 빼버리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그러나 잠시 후 걱정하던 대로 집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전화벨 소리가 그물처럼 그를 옭아매 왔고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아빠, 핸드폰이 왜 꺼져있어요.”
혜인의 목소리에 준태는 순간 긴장이 풀려 귀가가 늦는 딸을 꾸중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다.”
“아~!, 저요 일찍 들어가려고 했는데, 내일 학교 행사 준비 때문에 늦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아무래도 문자 메시지만 보내놓고 불편했는지 목소리에 애교와 미안함이 섞여 있다.
“알았다. 너무 늦지는 말아라.”
준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괜한 생각이었다고, 휴대전화의 모르는 전화번호도 단순한 광고전화였을 거라고 생각하며 TV 리모컨을 집어 드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소리치자 문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이도진 입니다.”
그 목소리에 준태는 순간 얼어 붙었다. 쌓여왔던 불안이 폭발하여 머리 끝에서 흘러내린다. 저 남자가 왜 자신을 따라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계속 귀찮게 하면 경찰에 신고할거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 입니다.”
“그러니까 난 당신하고 나눌 이야기 따위 없단 말이요! 어서 돌아가시오.”
준태가 이렇게 소리치자 문 뒤가 조용해 졌다. 돌아간 걸까 하는 마음에 문으로 다가가 기척이 나는지 살펴보려는데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 차에서 이야기 할 때만 해도 당신이 내가 찾는 그 사람이라는 확신이 없었는데, 이렇게 나를 피하는 것을 보니 그 사람이 맞는 것 같군. 그래 유운스님의 목도는 아직 가지고 있소? 그렇다면 열심히 가다듬어 놓는 게 좋을 거요.”
문을 넘어 들려오는 남자의 말투는 공손했던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때문일까? 준태는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다듬어 놓으라니? 무엇을, 왜? 수 많은 물음이 결국 문을 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이도진이란 남자는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기분 나쁜 꿈처럼 불안만을 남겨놓고 이미 사라진 뒤였다.
불안이 깊어지고, 가다듬으라는 사내의 말이 준태를 짓누른다. 도진이란 남자의 목적, 그리고 이유 그리고 다른 질문들이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도진이란 자는 집, 휴대전화 번호, 직장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혜인이에 대해선…?’
문득 혜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혜인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학교에 다니는 딸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경찰에 신고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끼친 피해라는 것은 딱히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전화를 하거나 집에 찾아왔을 뿐이다. 스토킹(stalking)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고, 준태가 받은 정신적 피해란 것도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스스로 만든 망상으로 여겨질 것이 뻔했다.
준태는 안방으로 돌아와 옷장 안의 목검을 꺼냈다. 두 손으로 잡고 세로로 길게 베어본다. 목도 끝이 무거워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당긴다. 다시 검을 세워 들어보니 이마 위로는 더 올라가지도 않는다. 가다듬으란 말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도를 다시 잡았던 것이지만 이래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목도를 옆에 세워 놓고 어깨를 주물러보지만 이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문득 치밀어 오른 화에 그는 세워 놓은 목도를 손으로 쳐서 쓰러뜨렸다. 목도가 방바닥에서 낮게 튕기며 누웠고 준태는 일어서서 거실로 나왔다.
스스로의 불안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그는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인정하지 않지만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도진이란 남자가 풍기는 위험한 냄새 때문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그러기엔 준태의 불안이 녹녹히 넘어가 주지 않는다.
12시가 다 되어 혜인이 들어올 때까지 준태는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빠 저 왔어요.”
“응, 그래.”
딸의 늦은 귀가에 그는 별 반응이 없다. 혜인은 소파에 앉아 TV를 주시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떤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치 타인이 된 것 같은 느낌, 불과 몇 시간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아니 껍질은 그대로 인 채로 알맹이만 바뀐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때, 준태가 벌떡 일어나 아직 현관에 서 있던 혜인에게 다가갔다. 왜일까? 혜인은 그 순간 마주하고 있는 아버지의 눈빛과 움직임에서 공포를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머리가 선다.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혜인아! 너 어학연수 가고 싶다고 했지?”
“네?”
뒷걸음질 하던 혜인이 아버지의 갑작스런 제의에 멈추어 섰다. 쏟아내듯 자신을 향해 어학연수에 대해 제안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왠지 간절했다.
“그런데 왜요? 아빠!”
“단기로 짧게 다녀오지 않을래?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혜인은 무엇인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일이 있는지 묻기 전에 아버지의 제안을 일단 미루었다.
“지금은 힘들고 1학년 마치고 가려고 하는데……”
“아! 그래!”
예상하던 답이었다. 갑자기 꺼낸 이야기에 순순히 가겠다고 할 딸이 아니라는 것을 준태는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은! 아니다. 그냥 물어본 거야.”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혜인은 더 묻지 않았다.
“저 들어갈게요. 안녕히 주무셔요.”
“그래!”
준태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깊게 숨을 들이켜 보지만 효과는 없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정신을 집중하기 힘들다. 거실 탁자 위의 담배를 들었다가 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결국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회사에서 그는 온통 신경을 전화에 쏟고 있었다. 원래 잘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가 광고전화로 몇 번 울린 덕분에 더욱 더 그를 민감하게 만들었다. 웬일인지 다시 걸려올 것이 분명한 그 전화는 끝내 걸려 오지 않았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에게 택배가 도착했다. 폭 20센티미터에 길이 1미터가 조금 넘는 긴 상자가 자신의 탁자 위에 놓여지자 준태는 택배직원이 내민 PDA에 서명을 하고 상자를 들어 뒤에 세워 놓았다. 앞 자리의 이주희 대리가 뭔가 하고 궁금한 눈치로 상자를 몇 번 바라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자를 뜯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먼저 나간다고 사람들에게 인사하고는 상자를 들고 지하 주차장의 자신의 차로 갔다. 실내 등에 비친 상자 위의 이도진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포장지를 뜯어내자 안에서 나무로 된 긴 상자가 나온다. 상자 뚜껑을 열자 안에 들어 있는 검이 푸른 빛을 뿜는다. 어떤 물건이 들어 있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지만 오래간만에 보는 그 푸른 섬찟함이 긴 한 숨을 내뿜게 한다. 혹 편지 같은 것이 없나 찾아보니 상자 뚜껑 안 쪽에 종이가 붙어있었다.
“당신과의 한 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거절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판에 끌어낼 방법은 많으니까.”
날짜도 장소도 쓰여있지 않은 도전장이다. 상자에서 검을 들어 보려다 그만 두고 상자를 덮었다. 그리고는 상자를 뒷좌석으로 옮겨 놓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준태는 자신이 예전에 베었던 소나무를 떠올렸다. 산사에 머물며 쉴새 없이 검을 휘두르던 시절, 자신이 검을 놓고 산을 내려오도록 했던 일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귀신이 잘 꼬이는 사람이 있다. 꼬인다기 보다 잘 느낀다는 말이 더 맞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준태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가 어머니께 들은 바로는 어렸을 적, 이런 일이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준태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제 여섯 살짜리 아이가 밤새 사라지자 말 그대로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고 가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준태를 찾아 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가 다 지나 해질녘이 되었을 때, 옆 마을에 사는 오촌 당숙의 손에 이끌려 준태가 집으로 돌아왔다. 새 신을 신고 생글생글 웃으며 당숙 손을 잡고 집에 들어오는 준태의 모습에 가족들이 넋이 나가 한참을 쳐다보고 있으니 오촌 당숙이 말하길, 새벽 일찍 장에 가는데 고갯마루에 준태가 앉아 있더라는 것이었다. 오촌 당숙도 처음에는 준태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새벽에 고갯마루에 어린아이가 앉아있는 것이 하도 신기해서, 어디 사는 누구냐 물었더니 이 아무개의 아들 이준태라고 하여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가 왜 이렇게 일찍 여기와 있냐 물었더니 할아버지 손을 잡고 장에 가는데, 잠깐 오줌 싸는 사이에 할아버지가 없어져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4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자 어른을 놀리면 못쓴다고 혼냈더니 할아버지가 밤에 찾아와서 오늘 장이 열리니 자기가 좋아하는 떡이며 새 신을 사준다고 했다며 우는 통에 할 수 없이 준태를 데리고 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걱정을 할까 싶어, 장에 가서 준태를 데리고 있다고 사람을 보냈는데 혹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사실 점심나절에 당숙이 보낸 사람이 다녀갔지만 집 안 사람들이 모두 준태를 찾으러 나간 덕분에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것이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아들이 상한 곳이 없는지 껴안고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준태의 어머니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회초리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종아리에 퍼런 줄이 몇 개가 생겨도 준태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갔다고만 할 뿐이어서 어머니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뒤에도 가끔 준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툇마루에 앉아 감자를 먹다 허공에 대고 감자를 내밀어 왜 그러느냐 물으면 작년에 물에 빠져 죽은 옆 집 창우가 앞에서 달라고 했다고 하거나 한 밤 중에 일어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무당을 불러 굿도 하고 부적을 베개에 집어 넣기도 했지만 준태의 그런 수상한 행동들은 나아지지 않았고 기가 약해 그런다는 말에 고심을 하다 검을 가르쳤더니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차츰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준태는 사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날은 철이 들고 나서 처음으로 준태가 귀신을 보게 된 날이었다. 땀과 더위 그리고 잡념으로 잠들 수 없던 여름 밤이었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을 이룰 수 없어 멱이라도 감을까 하고 검을 들고 계곡으로 향했다. 산짐승이 많아 혹시나 하고 가져간 것이었지만 유운스님이 밤에 검을 들고 나갔다는 것을 알면 호통을 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훤한 달빛을 즐기고 있자니 졸음이 몰려와 물기도 닦지 않고 옷을 입으려는데 그 앞에 거무스레한 형체가 나타났다. 누구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대답 대신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여자였다. 물기 어린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준태에게 다가서는 그녀의 모습에 피 끓는 청춘이 쿵 하고 내려 앉더니 이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다. 머리가 멍해지고 눈이 흐려 눈을 비볐더니 어느새 다가온 그녀의 하얀 손이 준태의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살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고 꽃 향기 같은 것이 준태의 후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훑어가는 여자의 손길에 잠시 이대로 맡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준태가 옆에 놓인 검을 뽑아 길게 가로로 베었다. 아무리 방금 찬물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그녀의 손길에서는 온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하지만 검은 허공을 갈랐을 뿐, 방금 전까지 자신 앞에 서 있던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알몸인 채로 검을 뽑아 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다시 꽃 향기가 나는 듯 하더니 그의 뒷목에서 손길이 느껴졌다. 그 손길을 뿌리치듯 검을 휘두르고 앞으로 튀어나가자 어느새 저 앞에서 여자가 준태에게 그 하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얼굴도 표정도 보이지 않는데 그 하얀 손을 본 순간 준태는 묘한 살의를 느꼈다. 상대가 사람이 아닌 귀신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일까? 준태는 알몸인 채로 검을 들고 귀신을 향해 뛰어갔고 그 뒤로는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뒤의 일은 모두 유운스님에게 들은 것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방에 누워 있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운스님은 귀신에게 홀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제자가 점심공양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자 유운스님은 산을 뒤졌다. 검까지 들고나간 제자가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그는 계곡에서 한 참 떨어진 산 중에서 알몸으로 검을 잡고 서 있는 준태를 발견했다. 하지만 뒤에서 몇 번이고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아 가까이 가서 살폈더니 온 몸에 잔 상처가 가득 난 채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기이한 것은 그의 검이 앞에 서 있던 나무를 절반이나 파고 들어가 있었고 주변을 살펴보니 주변의 나무들이 모두 검으로 상처가 나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에 준태가 자신이 본 하얀 손의 여자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유운스님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눈을 지긋이 감더니 말했다. 그리고는 검을 놓고 산을 내려가라고 했다. 준태가 놀라 어찌 그러시느냐 묻자 유운스님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더 가르칠 것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으며, 더 배우면 언제 또 귀신이 나타나 그를 괴롭힐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 귀신의 정체를 묻자 유운스님은 검귀라고 했다.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검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 나타나 피를 보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귀신을 쫓으려 검을 가르쳤지만 이제 그 때문에 귀신이 붙었으니 이제 다시는 검을 만져선 안 된다고 스님을 말했다. 지금 바로 하산하라는 스승의 매정함에 준태는 그 뒤로 일 주일이나 매달렸지만 스승은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포기하고 떠나는 그에게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목도를 내어 준 것이 마지막이었다.
상자를 들고 들어선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준태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이도진이 보낸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연 순간 섬찟함이 방 안에 퍼진다. 검을 꺼내 들어보니 예전의 묵직함이 그를 반긴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다시 상자 안에 검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상자를 안방에 가져다 놓고는 대신 목도를 들고 나왔다. 자세를 잡고 짧게 내리 그어 본다. 어찌된 일인지 어깨가 가볍다. 천천히 백 번을 채우고 나자 숨이 거칠어지고 팔뚝이 당긴다. 하지만 어깨가 아프지 않은 것이 신기해 그는 몇 번 더 하고는 소파에 앉아 어깨를 만져보았다.
준태가 집에서 검을 만지고 있을 때, 이도진은 의자에 팔이 뒤로 묶인 채 앉아있는 여자 앞에 서 있었다. 입에는 테이프가 붙여진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여자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는 스스로가 악당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도진은 옆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여자 앞에 다리를 꼬고 마주 앉아 자신이 그 잘린 나무를 발견한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순간 자신이 악당으로 걸음을 내디뎠다고 그는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경계와 공포가 가득한 그녀의 눈은 도진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여자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자 도진은 테이프를 떼어내려다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여자에게 말했다.
“이름이 혜인이었나? 네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 네 아버지와의 한 판이 끝나면 결과가 어찌되었든 넌 풀려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네 아버지가 내 요구를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르지.”
도진의 말에 혜인이 몸부림치는 바람에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도진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의자에 앉아서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이준태씨가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알아볼까?”
준태는 전화를 받자마자 괴성을 질렀다. 가슴 한 복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그 괴상한 소리는 마치 사냥꾼의 덫에 걸린 야수의 것처럼 처량했다.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인간을 맞닥뜨리고 그는 살의로 떨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부여잡았다. 이를 악물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머리는 이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전화에서 들린 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 친다. 전화를 들어 경찰에 신고를 하려고도 했지만 단지 자신과의 대결을 위해 딸까지 납치하는 자가 경찰에 신고 했다는 것을 알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소원대로 싸울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앞에 놓인 검을 다시 들어본다. 진검으로 하는 대결이라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었고 죽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 뻔했다. 죽음이라는 말과 함께 딸의 얼굴이 떠오른다. 새벽 5시 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준태는 결국 3시까지 고민을 하다가 목검과 이도진이 보낸 검을 싸 들고는 집을 나왔다. 이도진이 알려준 장소까지 가려면 일찍 출발해야 했다. 차가 뜸한 한 밤의 도로를 운전하며 졸음이 몰려오자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딸이 납치당하고 검에 베어 죽을지 모르는 순간에도 자신의 너무나 솔직한 몸이 우스웠다. 한 시간 반 정도 운전해 도착한 곳은 시외의 조그마한 조립식 건물이었다. 농기구를 만드는 공장이었는지 앞에는 부서진 농기구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한쪽에는 XX농기구라는 낡은 간판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주변은 온통 논 뿐이고 멀리 인가가 몇 채 보이긴 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준태는 차에서 내려 손 전등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건물 안 한쪽에는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옆 벽에서 전원 스위치 같은 것을 발견했다. 스위치를 올리자 차례차례 형광등이 깜빡이며 불이 들어온다. 준태는 책상 위에 들고 온 목검과 검을 내려 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에 엎드려 건물 안을 둘러보았다.
준태는 자신이 그의 나이 때는 어땠는지 생각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와 자신의 생각에는 개성이란 것을 제외하고도 상당한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세대 이전의, 그러니까 자신으로부터도 수 세대 아니 수 십 세대 전의 가치를 위해 찾아온 것이다.
‘그래! 그는 어쩌면 쉴 새 없이 변해가는 세상이 낳은 돌연변이 일지도 모른다.’
이전의 가치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어떤 증거. 만약, 그게 아니라면 검에 미쳐 죽은 어느 광인 검객의 환생일지도 모르겠다고 준태는 생각했다. 그가 광인 검객의 환생이라면 자신은 누구였을까? 광인의 악행을 막는 존재였을까 아니면 그의 악행에 희생당하는 희생자 중 한 명이었을까? 하지만 자신이 누구의 환생이었을 지를 생각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 정리해야 함을 깨달았다. 단지 오래 전에 검도를 익혔던 마흔 아홉 살의 회사원. 아홉 수 때문인지 지금 여기서 이도진이란 남자를 기다리고 있지만, 자신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힘없고 나약한 이 세상 수없이 많은 가장 중 한 명이란 것을 준태는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젊은 시절 검에 빠져 몇 년 세월을 보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젊은 시절의 치기일 뿐이었다.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고, 정점에 다다르고 싶었던 욕망으로 밤 잠을 못 이루던 시절…… 하지만 욕망이 가득한 마음에서 道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버리고 또 버리고 아니 잊고 또 잊어 그는 겨우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도를 얻고자 검을 버렸는데 그 젊은 남자가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소리 없이 찾아온 젊은 날의 욕망이었고 또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거절하는 자신을 꼬여내기 위해 딸을 잡아놓고 기다리게 하고 있다. 그것으로 그가 자신보다 몇 배 우위에 있으며 자신은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정신을 날카롭게 갈아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꺼지지 않을 형광등을 안광으로 깨어버릴 듯한 살기로 온 몸을 쳐 발라야 한다. 그 살기로 이 집 전체를 집어 삼켜 나보다 위에 있는 그가 그 살기 안에 걸어 들어올 때 그의 심장을 얼어 붙게 하고 그의 움직임을 잡아야 한다. 준태는 이렇게 마음을 다 잡았지만 살기를 품고 언제 열릴지 모르는 눈 앞의 문을 주시할 때마다 얼마 후 바닥에 쓰러질 자신, 또는 그 남자의 모습이 피를 흘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에 피 철갑을 하고 겨우 고개를 든 채 자신을 보며 눈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애초에 목숨을 건 승부를 원하는 이도진이란 사내의 머릿속이 이상한 것이다. 지금 같은 세상에 목숨을 걸고 싸워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 인가. 행여 그렇게 라도 하면 새 세상이 열리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죽음에 짓눌린 채 발목을 잡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그는 그것을 원하고 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준태는 땀이 손잡이에 배어든 목도를 한 번 쥐어본다. 미끌미끌한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 땀을 닦아내고 다시 잡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은 이전과는 목도를 쥔 목적이 이전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라앉은 마음의 작은 요동이 심장의 박동을, 머리 속의 아드레날린을 조절한다. 숨이 가빠지고 눈이 흐리다. 마치 하늘을 걷고 있는 것처럼 움직임이 두리뭉실하다. 갈고 또 갈아야 하는데 두리뭉실, 베어지기 쉬운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 기다림이란 이렇게 사람을 무뎌지게 하는 구나! 하고 준태는 한숨 지었다.
집에서 여기에 오기까지 그는 패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약속된 시간이 다가올수록 한 쪽에서는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꿈틀거린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진정되고 눈이 환해진다. 책상 위의 목도를 들고 일어서서 휘두르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난다. 예전 같진 않지만 상대에게 제대로 맞는다면 치명타가 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두개골이나 쇄골, 무릎, 팔꿈치. 사람의 몸에서 일격에 부술 수 있는 부분을 찾는다. 두개골은 위험하지만 다른 부분은 적의 전의를 상실케 하고 죽이지 않아도 될 정도의 피해를 입혀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검을 들고 있는 상대에게 그것이 가능할 정도의 실력이 자신에게 있을 리 없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이도진이 건물 안에 들어섰다.
“내 딸은 어디에 있나?”
화를 누그러뜨리고 준태가 물었다.
“끝나면 곧 풀려날 거요.”
“한가지만 물어보겠네. 어째서 진검 대결 같은 것을 원하는 건가?”
“어렸을 적 유운스님을 만났을 때 예전에 가르치던 제자 중에 실력은 좋았으나 그 때문에 귀신이 꼬인 제자가 있어 할 수 없이 하산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그리고 그 뒤 사람이 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그 소나무를 발견하고, 또 그게 누군가에 의해 베어진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처음에는 그 사람과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 되었소. 스님께서 말씀하시던 이야기의 제자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지. 그러나 만나는 것 만으로는 부족했소. 어떤 사람일지 그와 실력을 가늠하고 싶어졌고 내가 바둑판을 베어낸 뒤에는 나와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궁금해졌지. 그 다음에는 격에 맞는 대결을 하고 싶어졌을 뿐이요.”
“단순히 그것 때문에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겠다는 건가?”
“당신에겐 단순한 이유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검이 삶의 이유였으니까.”
“지금이라도 내 딸을 보내준다면 모두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네.”
준태의 말에 이도진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대답대신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을 뽑았다. 준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목도를 집어 들었다.
“진검으로 겨루기를 원한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난 목도로 하겠네. 자네에게 받은 진검 보다는 손에 익으니까”
준태의 말에 이도진도 더는 아무 말 없었다. 준태는 한 손으로 목도를 휘둘러보고는 마주섰다. 그리고 자세를 잡고 두 손으로 목도를 잡았다. 진검의 상대와 마주건 것 치고는 마음이 평온했다. 상대의 검 끝과 눈을 노려보고 있다. 그와 함께 상대의 어깨도 살핀다. 이도진이 검을 쳐들면 목에 목도를 찔러 넣거나 팔 사이에 목도를 집어 넣고 비틀어 검을 놓게 하려고 마음 먹는다. 아니 오른쪽으로 피해 빈 뒷 목을 내리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고민한다. 어찌되었거나 먼저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대의 움직임에 빨리 반응하는 것, 준태는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10분이 지나자 어깨가 아파온다. 동상처럼 굳어있는 채 상대를 노려보고 있자니 눈도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무디어지고 신체로부터의 변화에는 날카로워진다.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 따끔거리며 간지러운 등, 조금씩 흔들리는 어깨. 게다가 흐릿해진 눈에 비친 이도진의 등 뒤가 어른거린다. 아지랑이 같기도 하고 연기 같기도 하다. 왼 손에 힘을 주고 이도진의 눈을 바라본다. 흔들림 없는 눈이 인형 같았다. 굳게 다문 입이 금세 기합을 내지를 것 같다. 그 때 이도진의 등 뒤에서 일렁였던 아지랑이가 어떤 형체를 만들어간다. 사람의 머리 같은 모양이 되더니 이윽고 누군가의 시선이 되어 준태를 바라보고 있다. 두 개의 시선이 준태를 바라본다. 놀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그 상황을 즐기는 듯, 그 시선은 이도진의 등 뒤에서 웃고 있는 것 같다. 준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지를 뻔 했다. 그것은 자신이 젊은 시절 계곡에서 보았던 그 여자였다. 하얗고 부드러운 자극으로 자신을 유혹하고 결국 산에서 내려오게 했던 그 여자가 이도진의 등 뒤에 숨어 다시 손 짓하고 있었다. 가볍고 부드러울 것 같은 몸이 이도진의 검 끝으로 날아와 준태를 바라본다.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지만 그 형체는 사라지지 않고 선명해질 뿐이다. 마치 준태의 목검이 자신을 베도록 유혹하는 것처럼, 이도진의 검에 감긴 채 손을 뻗어 목검 끝을 건드린다. 준태의 손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지만 목검을 휘두른다면 사라질 것 같다. 그러나 그 뒤에는 이도진의 초점 없는 눈이 준태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어깨의 통증은 무거워지고 그녀의 움직임은 노골적이다 못해 모욕적이 되어간다. 귓가에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귀를 쫑긋거리는 데 어찌된 일인지 건물 안의 형광들이 꺼졌다. 다행히 동틀 때가 되었는지 앞에 서 있는 이도진의 모습은 흐릿하게 나마 눈에 들어온다. 그 역시 불이 갑자기 꺼진 것에 놀랐는지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여자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그 여자가 준태의 다리 밑에서 그를 올려보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도진의 등 뒤로 열린 문 사이로 눈부신 빛이 새어 들어온다. 이도진의 몸이 그림자로 변하더니 손 위에서 뭔가 길쭉한 것이 번쩍거린다. 준태는 자신도 모르게 목도로 머리를 향해 내려오는 이도진의 검을 막았다. 오른쪽으로 피한 덕분에 이도진의 힘있는 일격이 목도 끝을 사선으로 베어 냈다. 잘려나간 목도 끝이 딱딱한 바닥에서 소리를 내며 굴러가고 이도진의 진검이 이제 준태의 배를 노리고 가로로 베어 들어온다. 준태의 눈에 이도진의 목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눈이 겹쳐 들어온다. 하지만 이도진의 검은 벌써 준태의 배를 스치고 지나갔다. 준태는 이도진의 드러난 쇄골을, 아니 그 여자의 목을 내리쳤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검을 틀어 아직도 이도진의 등 뒤에 서 있는 여자의 눈을 찔렀다.
배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려 허리춤을 타고 내려간다. 쇄골을 맞은 이도진은 오른손은 늘어뜨리고 왼손으로 검을 잡은 채 옆으로 몇 걸음 움직이더니 갑자기 자리에 주저 앉았다. 준태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잡고 뒤로 물러서 들어오는 햇빛에 상처를 살폈다. 배꼽 위로 길게 가로줄이 그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깊게 베이진 않은 것 같았다. 준태는 다시 목도를 잡고 바닥에 주저 앉아있는 이도진을 바라본다. 그가 왼손에 쥔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려고 하다 다시 힘을 잃고 주저 앉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목 언저리에서 뭔가 긴 그림자가 흘러내렸다. 준태가 다가가 보자 이도진의 목이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뜯겨나가 있었고 거기서 붉고 진한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준태는 목도를 내팽개치고 다가가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가 검을 떨구고 뭔가 말하려는지 준태의 얼굴을 양 손으로 잡는다. 그의 인형같이 무표정한 눈이 촉촉히 젖어 준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등 뒤의 여자는……?”
간신히 입을 연 이도진의 눈이 준태의 왼쪽 어깨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태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까의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목도에 목을 물렸군……”
힘 빠진 이도진의 목소리가 처량하다. 준태는 그제서야 아까 자신이 여자의 눈을 향해 찔렀던 공격에 이도진의 목이 뜯겨나갔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가 그의 입을 막는다. 신음소리 마저 새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손에서 느껴지는 박동도 점점 희미해진다.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이도진은 이 말과 함께 눈을 감으며 준태의 손을 잡았다. 거기에는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준태는 이도진을 눕히고 그 앞에 털썩 주저 않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 다시 나타났는지 그 여자가 반대편에 앉아 이도진과 준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웃는다. 창백한 웃음이 자신을 바라보며 비웃자 준태는 바닥에 떨어진 목도를 여자를 향해 집어 던지고는 손에 들린 피 묻은 종이를 펼쳤다. 준태가 출발하는 것을 확인하고 혜인을 풀어 주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준태는 종이를 집어 넣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와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차 안에 놓아두었던 휴대전화에는 혜인으로부터의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하지만 준태는 딸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대신 휴대전화를 들고 LCD 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형사가 돌아간 뒤의 병실에는 혜인과 준태만 남아 있었다. 혜인은 의자에 앉아 TV의 아침프로를 바라보고 있다. 준태는 겁에 질려 있을 거라고 생각한 딸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인 것이 신기했다. 이제 다 커서 언제라도 자신의 품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아 섭섭하기도 했다. 진통제를 먹었지만 무뎌진 통증이 간헐적으로 반복된다.
“아빠! 왜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어요?”
TV를 보고 있는 줄 알았던 혜인이 시선은 그대로 둔 채 입을 열었다.
“정당방위잖아요. 그 사람은 아빠를 죽이려고 했고 그래서 아빠가……”
죽였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는 혜인의 손을 준태가 꼭 쥐었다.
“아니 그는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싸워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혜인이 고개를 돌려 준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온하기 그지 없는 준태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 채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과 너무도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서 배신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정당한 결투였다고 말씀하신 거에요? 아빠는 믿을 수 있겠어요?”
혜인의 음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가 살아있다면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죽었으니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구나.”
“왜요!”
혜인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따지듯 자신을 노려보는 딸의 눈을 준태는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형사가 사정청취를 하러 들어왔을 때 그는 이도진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것이 정당방위가 된다거나 과잉방어가 된다거나 판결이 내려지더라고 자신이 이도진을 죽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그것을 억지로 피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비록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일 이었다고 하더라고 자신과 검을 맞댄 사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었다. 젊은 날의 자신을 그를 통해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죽어버린 그를 단순한 범죄자로 치부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쨌든 그는 형사에게 진검 대결이란 말을 꺼냈고 형사는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다는 듯 그것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 남자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에요!.”
순간 혜인이 손을 뿌리치고는 병실을 나갔다. 준태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째서 자신의 딸이 저렇게 화가 나 있는지 생각했다. 납치당했을 때의 충격과 하루 아침에 살인자가 되어버린 아버지 때문일 거라고 준태는 생각했다. 자신의 딸 앞에 놓여 있을 여러 가지 가혹한 상황들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동시에 이도진의 마지막 얼굴도 떠 오른다.
“진검 대결 같은 게 요즘 세상에 있을 리가 없지!”
준태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침대 옆 탁자에 올려 놓았던 변호사의 명함과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번호를 누르다가 문득 침대 끝을 바라보았다. 이도진과 그 여자가 거기 서서 준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태는 그 두 사람을 한 참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전화를 걸었다. 그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 다시 보았을 때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서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는 팔을 위로 들었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목검을 잡으며 잊었던 어깨의 통증이 다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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