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여왕이 되다.
2006년 7월 18일 by 김 승엽 View blog reactions
마녀가 깨어났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뻗어 무가치함으로 생겨난 빈틈을 벌리고, 망각을 핑계로 기어나와 면도칼 같은 세상을 향해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그 때문에 한 남자는 길고 긴 어둠에서 빠져나와 다시 다른 어둠으로 들어갔고, 아주 오래 전 멈추었던 이야기가 카세트 테이프가 돌아가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십 대 후반의 이혼남, 그리고 불명예 퇴역한 군인이 택할 수 있는 직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는데 딱 일년이 걸렸다. 배와 허벅지에 살이 붙기 시작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늦어지던 어느날 아침, 나는 전처에게 전화를 걸어 작별인사를 하고, 아직 잠이 덜 깨 엄마 옆에 바짝 붙어 눈을 비비고 있는 딸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한참 바라보다가 그대로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왔다. 내가 떠난다는 말에 두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고 아무런 감정 표현도 하지 않았다. 어디로 갈 지 확실하게 계획을 세우진 않았지만 한가지 사실 만은 확실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이 곳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뒤로 틀어올린 금발머리는 반짝였고, 전쟁터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흰 피부와 – 희다는 것 보다 창백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 가늘고 길게 뻗은 손가락은 부드러운 굴곡이 살짝 드러난 군복과 함께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녀를 노골적인 눈으로 쳐다 보게 만들었다. 그러다 잠시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내 시선을 발견한 그녀는 약간 미소를 띈 얼굴로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소와 눈빛이 얼마나 내 가슴을 흔들었는지, 방금 전 그녀를 바라보며 내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개인적인 상상들을 매우 추잡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에 눈길을 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앞에 앉아있던 용병대의 무리들은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긋하지만 위험한 향기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했는지, 향기에 취한 나비처럼 그녀에게 사푼히 앉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중 한 명이 용감하게도 그녀에게 날아들었는데 그게 나비처럼 상냥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옆을 흘깃거리며 여자의 얼굴을 살피는 것 같더니 징그러운 – 다른 형용사가 생각나지 않지만 이 단어는 그의 표정을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의 표정에 걸맞았다. –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 하듯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저런 미인이 전쟁터에 나타나는 건 여러가지 의미에서 손해야. 아마 제대로된 밤을 보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말야. 저 여자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질러대는 교성을 들어보고 싶군. 그럼 딱 알수 있을텐데 말야."
하지만 여자는 그의 예의없고 천박한 말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니햇 아래로 그녀의 눈이 잠시 날카롭게 빛났을 뿐이었다. 여자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몸이 달아오는 것은 남자 쪽이었다. 이번에는 더욱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밤 어때?"
그 말에 여자의 오른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와서는 보기 흉할 정도로 벌리고 앉은 남자의 다리 사이에 발을 올려놓고 남자의 사타구니 사이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말 많은 남자들이 날 만족시킨 적은 없었어. 어떤 것이던지."
그리고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남자의 팔을 쳐내고 언제 꺼냈는지 은빛 날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나이프를 꺼내 남자의 뺨에 댔다. 천천히 남자의 눈과 일그러지는 얼굴을 노려보며 나이프로 뺨을 그어내리자 길게 붉은선이 얼굴에 생겨났다.
"그리고 난 곱상한 얼굴은 좋아하지 않아."
남자의 주먹이 여자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여자는 남자의 둔한 동작을 살짝 피하고 뒤로 물러나 나이프에 묻은 피를 핥았다가 바닥에 뱉었다. 덕분에 그녀의 입술이 더욱 붉게 반짝였다. 남자는 자신의 뺨에 손을 대서 피를 확인하고는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뒤를 조심하는게 좋을거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여자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말했다.
"네가 내 뒤에 설 수 있을때는 네 뒤에 날개를 달고 있을때 뿐일거야. 그 덩치에 날개를 달고 있으면 꽤 어울리겠는데, 귀여울 것 같아."
그 말에 남자가 무서운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왼쪽 끝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다시 앉게 하고는 말했다.
"장난친 거 가지고 법석 떨지마라."
중년 남자의 말에 다른 자들의 웃음 소리와 잡담으로 시끄러웠던 기내가 금새 조용해 졌다.
완성도 못하고 시작 부분만 끄적여 놓은 반토막도 못 되는 글들이 늘어가고 있다. 시작할 때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 놓고 시작하면 좀 덜할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이미지 하나와 한 줄의 제목에서 시작해 윤곽이 잡히는 것 같으면 맘먹고 쓰기 시작해 중간에 한 번 텀을 주기 때문에 중간에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이것도 그런 놈이다. Draft 상태로 근 한 달을 묵었지만 결국 풀리지 않고 있다. 될대로 되라 식으로 밀어 붙여야 어떤 모양으로든 만들어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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