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in – 마녀, 여왕이 되다 #3
2007년 11월 14일 by 김 승엽Tw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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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을 분해해 살펴보는 사이 앞 쪽의 문이 열리더니 사내들이 일어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부대장과 경호원이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나도 그들과 함께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베낭과 소총을 들고 밖으로 나오자 거대한 수송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쟈크란 남자도 시야에 보이지 않았고 다른 남자에게 물어보고 싶지도 않아 그만 두었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사내들이 수송선 안으로 사라졌고 나도 대열의 맨 마지막에 서 있다가 수송선에 올라탔다. 어둑한 조명 사이로 사내들의 얼굴이 밖에서와는 달리 가라앉은 것을 신기해하며 나는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소총을 좌석 옆에 세워 놓고 베낭과 소지품을 정리하는 사이 수송선의 입구로 두 명이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젊은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중년의 남자였다. 남자 때문인지 아니면 여자 때문인지 두 사람이 나타나자 작게 웅성거렸던 수송선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중년의 남자는 입구에 서서 수송선 안을 한번 둘러본 뒤에 좌석에 앉았고 여자는 남자와 떨어진 곳의 비어 있는 좌석에 가서 앉았다. 잠시 뒤 문이 닫히고 수송선 안의 조명이 밝아지더니 엔진이 출력을 높이는지 선체가 작게 흔들리더니 지상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베낭을 정리하며 저 두 명중 누가 내 경호원일지 생각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는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년의 남자 쪽이 경호원으로 훨씬 믿음직스러웠지만 여자가 이 부대의 지휘관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여자 쪽이 경호원이고 중년의 남자가 지휘관이라는 쪽이 자연스러웠고 그러한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잠시 뒤 쟈크가 중년의 남자에게 다가가 내 쪽을 쳐다보며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뭔가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확실해 보였다. 쟈크의 보고에 남자가 바라보았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군데군데 흰머리가 보이는 갈색머리와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 아래로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이며 나를 훑어 보았다. 그의 강렬한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눈을 돌리자 그도 눈을 돌려 쟈크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을 하더니 이내 눈을 감았고 쟈크도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지휘관이라면 여자가 내 경호원일 것이 분명한데 그녀는 그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리 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았지만 왠지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이 말을 걸기 힘들게 만들었다. 한기가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랄까? 어쨌든 그녀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뒤로 틀어 올린 금발머리는 반짝였고, 전쟁터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흰 피부와 – 희다는 것 보다 창백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 가늘고 길게 뻗은 손가락은 부드러운 굴곡이 살짝 드러난 군복과 함께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녀를 노골적인 눈으로 쳐다 보게 만들었다. 그러다 잠시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내 시선을 발견한 그녀는 약간 미소를 띤 얼굴로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소와 눈빛이 얼마나 내 가슴을 흔들었는지, 방금 전 그녀를 바라보며 내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개인적인 상상들을 매우 추잡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 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에 눈길을 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앞에 앉아있던 용병부대의 무리들은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긋하지만 위험한 향기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했는지, 향기에 취한 나비처럼 그녀에게 사뿐히 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용감하게도 그녀에게 날아들었는데 그게 나비처럼 상냥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옆을 흘깃거리며 여자의 얼굴을 살피는 것 같더니 징그러운 – 다른 형용사가 생각나지 않지만 이 단어는 그의 표정을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의 표정에 걸맞았다. –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 하듯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저런 미인이 전쟁터에 나타나는 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손해야. 아마 제대로 된 밤을 보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말이야. 저 여자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질러대는 교성을 들어보고 싶군. 그럼 딱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여자는 그의 예의 없고 천박한 말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니햇 (Boonie hat) 아래로 그녀의 눈이 잠시 날카롭게 빛났을 뿐이었다. 여자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몸이 달아오는 것은 남자 쪽이었다. 이번에는 더욱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밤 어때? 내가 황홀한 밤을 약속하지!”
그 말에 여자의 오른쪽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와서는 보기 흉할 정도로 벌리고 앉은 남자의 다리 사이에 발을 올려놓고 남자의 사타구니 사이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말 많은 남자들이 날 만족시킨 적은 없었어. 그 어떤 것도.”
그리고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남자의 팔을 쳐내고 언제 꺼냈는지 은빛 날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나이프를 꺼내 남자의 뺨에 댔다. 천천히 남자의 눈과 일그러지는 얼굴을 노려보며 나이프로 뺨을 그어 내리자 길게 붉은 선이 얼굴에 생겨났다.
“그리고 난 너처럼 곱상한 얼굴은 좋아하지 않아.”
남자의 주먹이 여자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여자는 남자의 둔한 동작을 살짝 피하고 뒤로 물러나 나이프에 묻은 피를 핥았다가 침과 함께 바닥에 뱉었다. 덕분에 그녀의 입술이 더욱 붉게 반짝였다. 남자는 자신의 뺨에 손을 대서 흘러내리는 피를 확인하고는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뒤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여자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입가에 남아있는 피를 혀로 핥으며 말했다.
“네가 내 뒤에 설 수 있을 때는 네 뒤에 날개를 달고 있을 때뿐일 거야. 그 덩치에 날개를 달고 있으면 꽤 어울리겠는데, 귀엽겠어.”
그 말에 남자가 무서운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왼쪽 끝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다시 앉게 하고는 말했다.
“장난친 거 가지고 법석 떨지 마라.”
중년 남자의 말에 다른 자들의 웃음 소리와 잡담으로 시끄러웠던 기내가 금새 조용해 졌다. 여자는 자리에 앉아 얼굴을 만지는 남자를 쳐다보며 웃다가 나이프에 묻은 피를 시트에 문질러 닦고는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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