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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절망 클럽 &#187; 소설과 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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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흥미로운 것들에 대한 기록.</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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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Hellic &#8211; Abandoned Planet #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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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5 Feb 2013 04:44:59 +0000</pubDate>
		<dc:creator>김 승엽</dc:creator>
				<category><![CDATA[단편소설]]></category>
		<category><![CDATA[소설과 시]]></category>
		<category><![CDATA[Hellic]]></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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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연재글 목록 보기 &#187; 헬릭은 한 시간 정도 자다가,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두통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자기 전보다는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 전에, 빈 속을 채우면 증상이 더 나아질 것 같아 비상 식량 상자를 뜯으며 밖으로 나갔을 때, 제나가 낙하산 모듈 안에서 낙하산을 끄집어내 펼쳐놓고는 무엇인가 만들고 있는 모습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unfusion.kunsan.ac.kr/word/archive/1692#SID1692_1_tgl" title="See post to check out spoiler" class="internal">연재글 목록 보기 &raquo;</a></p>
<p>헬릭은 한 시간 정도 자다가,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두통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자기 전보다는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 전에, 빈 속을 채우면 증상이 더 나아질 것 같아 비상 식량 상자를 뜯으며 밖으로 나갔을 때, 제나가 낙하산 모듈 안에서 낙하산을 끄집어내 펼쳐놓고는 무엇인가 만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br />
소란스러운 소리의 정체는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공구 소리와 두 사람의 말다툼 소리가 섞여 만들어진 소음이었다.<br />
“뭘 만들고 있는 거지?”<br />
헬릭이 비상 식량 박스를 열며 이렇게 묻자 제나가 낙하산 끝을 펼치다 내려놓고 헬릭 손에 들린 포장지를 가리키며 말했다.<br />
“잘 됐군. 일손이 필요하던 참이었어. 컨테이너 뒤 쪽, 창고 구석에 보면 그 포장지와 상자를 모아 놓은 게 있을 거야. 그것 좀 가져다 줘.”<br />
“창고?”<br />
헬릭은 이내 레베카가 자신의 안드로이드 몸체를 꺼내왔던 장소를 떠올렸다.<br />
창고에 들어가자 불이 켜지며 창고 안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와 공구들이 잔뜩 메운 창고 한 쪽 구석에서 제나가 말한 포장지 묶음을 발견한 헬릭이 그것을 들고 나오려다 반대 쪽에 비상 착륙 장치가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제나와 레베카가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비상 탈출 장치는 거의 분해되어 몇 개의 외부 부품과 뼈대 정도만 남아있는 상태였다.<br />
잠시 지켜보던 헬릭이 포장지를 들고 나오려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몸을 돌려 비상 탈출 장치 쪽으로 다가갔다. 옆으로 슬쩍 보이는 그을음, 그리고 그 뒤편으로 길게 자국이 나 있었다. 일부러 이 흔적이 보이지 않도록 옆으로 슬쩍 돌려 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흔적이 공격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제나와 레베카가 탈출할 때 그들을 습격한 자들이 비상 탈출 장치를 공격했다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우주선과의 전투에서 비상 탈출 캡슐을 공격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것이 탈출자에 대한 인도적인 차원의 배려라면 좋겠지만, 실상은 공격 중에 비무장의 비상 탈출 장치를 공격하는 것이 화력이 낭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비상 탈출 장치가 목적이라면 공격도 가능한 일이지만, 가치와 비용 그리고 자원에 대한 인류의 집착은 묘한 불문율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br />
헬릭은 길게 늘어져 있는 피탄 자국에 살짝 손을 가져다 대 보고는 포장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br />
제나와 레베카는 펼쳐놓은 낙하산을 기구 형태로 만들고 연결 부분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 헬릭이 포장지와 상자를 가져오자 레베카가 그것을 받아 한 쪽으로 옮기고는 기구 형태로 만든 낙하산 외벽에 가져다 대 보고는 말했다.<br />
“이 포장지가 어느 정도는 번개를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만큼 완벽하지는 않을거야.”<br />
제나가 그 말에 상자를 가리켰다.<br />
“상자를 포장지와 낙하산 사이에 넣어서 한 겹 더 보호 한다면 어떨까?”<br />
“무게가 증가하게 되면 기구의 크기가 더 커야 할 텐데?”<br />
레베카가 대답하자 제나가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br />
“너도 정확한 계산으로 나온 수치는 아니잖아.”<br />
“그렇게 말한다면 계산해야겠군.”<br />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레베카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기구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계산하는 사이, 헬릭이 기구를 보며 말했다.<br />
“포장지와 상자를 모은 이유가 이거였나? 그렇다는 건 꽤 오래 기구를 만들 생각을 한 것 같은데…….”<br />
헬릭의 물음에 제나가 기구를 펼치며 말했다.<br />
“모아 놓으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였지, 이런 용도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어.”<br />
제나의 대답에 헬릭이 픽 웃음을 흘리고는 물었다.<br />
“그건 그렇고, 이 기구를 어떻게 띄울 셈이지? 공기를 가열해서 띄우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은 것 같은데.”<br />
헬릭의 물음에 제나가 한 쪽에 있는 비상탈출장치의 위치 조정용 가스 저장 탱크를 가리켰다.<br />
“저 가스, 헬륨이야. 저걸 채우려고 생각 중이야.”<br />
“수소가 아니라 헬륨이라고?”<br />
“수소였다면 기구가 아니라 번개 속으로 폭발물을 날리는 셈이었겠지.”<br />
헬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구의 한 쪽을 잡자, 레베카가 계산이 끝났는지 포장지 묶음 하나를 던지며 말했다.<br />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신뢰할 수 있는 오류 범위 내에서의 계산으로는 현재 제작 중인 기구 크기라면 충분해. 상자를 이용해도 되겠어. 빈틈 없이 똑바로 붙여.”<br />
헬릭은 자기 앞에 떨어진 포장지 묶음을 펼쳐 포장지 하나를 기구에 대 보았다. 정전기 방지를 위한 반투명 비닐 포장지에 헬릭의 얼굴이 일그러져 비쳤다. 열 접착을 위한 글루건(Glue-gun)을 든 헬릭은 한 장 한 장 포장지를 기구에 붙이기 시작했다.<br />
<span id="more-1692"></span><br />
낙하산의 접착을 맡은 제나가 글루건을 내려 놓고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br />
“아! 다 끝났어.”<br />
제나가 주저 앉자 레베카가 포장지 더미를 던지며 말했다.<br />
“끝나기는 이건 아직도 많이 남았어.”<br />
하지만 레베카의 다그침에도 제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헬릭은 아무 말 없이 포장지를 붙여나갔다.그 때, 제나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br />
“가스를 집어넣고 붙이면 금방 끝나지 않을까?”<br />
“입체적이 되면 더 붙이기 힘들어질 거야.”<br />
헬릭이 이렇게 이야기 하자 제나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br />
“아무래도 너무 지겨워서 다른 일을 해야겠어.”<br />
이렇게 말하고는 컨테이너 안으로 사라지자 레베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소 섞인 얼굴로 말했다.<br />
“어쩐지 오래 참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br />
레베카의 말에 헬릭이 씩 하고 웃음을 지었다. 인간을 판단하는 안드로이드의 혼잣말이란, 그녀가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매우 웃기는 일이 되었다. 완벽하진 않으나 묘한 동질감, 그것은 인간으로 착각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br />
그 뒤로 몇 번인가 제나가 컨테이너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지만 둘은 신경 쓰지 않고, 일을 계속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작업은 계속 되었다. 헬릭이 컨테이너에서 비상식량 상자를 들고나와 레베카의 작업을 지켜보며 말했다.<br />
“오늘 작업은 이만 하는 게 좋은 것 같은데.”<br />
헬릭의 말에 레베카가 들고 있던 포장지를 내려 놓았다.<br />
“난 작업을 계속해도 별 상관없지만, 다른 할 일도 있으니 그것을 먼저 끝내고 난 뒤에 해도 별 상관은 없겠군.”<br />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포장지 더미와 작업 공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헬릭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비상 식량을 뜯어 배를 채웠다. 레베카가 작업 중이던 기구를 정리하는 사이, 제나가 밖으로 나왔다. 2층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그녀의 이마에 작은 땀 방울이 맺혀 있었다.<br />
“내일이면 완성 될 것 같군!.”<br />
“뭘 하다 온 거야?”<br />
헬릭의 갈색의 비스킷 비슷한 합성 식품을 씹으며 물었다. 제나는 대답 대신 헬릭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더니 말했다.<br />
“저 비행선에 실을 통신장치를 만들었지. 밤에 레베카가 손을 보고 프로토콜을 분석해 입력하면 될 거야.”<br />
그녀의 말에 헬릭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br />
“난 놀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군”<br />
“처음엔 그럴까 했는데, 통신 장비가 눈에 자꾸 걸려서 말이지.”<br />
헬릭은 제나의 표정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 때, 레베카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br />
“비행선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인데 나만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 같군.”<br />
“아니야. 나도 꽤 바빴다고, 저기 실을 통신 장비를 만드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br />
제나가 레베카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자, 레베카가 그렇겠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br />
“마무리 짓지도 않고 내가 뒤처리 해야 할 일만 벌여 놓았겠지.”<br />
레베카의 말에 제나가 뭔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지만, 레베카는 이미 컨테이너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br />
“뭔가 굉장히 건방진 것 같지 않아?”<br />
제나가 사라진 레베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헬릭은 짐짓 모르는 척하는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나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br />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다면, 한 방 날렸을 거야.”<br />
그 말에 헬릭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헬릭의 웃음에 제나가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 한 참을 그렇게 웃어대던 두 사람이 웃음을 멈춘 것은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 보고서였다.<br />
구름 속에서 혈관처럼 번개가 퍼져나갈 때 마다, 그 부근의 구름이 하얀 피부처럼 빛났다. 머지 않아 저 안으로 비행선을 날려보내야 한다. 두 사람 모두 하늘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마음과 상관 없다는 듯 하늘의 번개는 무심히 계속 됐다.<br />
제나가 아무 말 없이 2층으로 올라가고 나자, 헬릭은 컨테이너 안을 들여다 보았다. 레베카가 통신 장치를 조작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말 없이 자신의 비상 탈출 장치에 누웠다. 내일이면 성패가 분명해질 터였다.<br />
다음 날, 헬릭이 일어났을 때는 레베카가 통신 장치를 꺼내놓고 기구에 포장지로 마무리를 끝마친 상태였다. 제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br />
“다 끝 마친 건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군.”<br />
헬릭이 눈을 비비며 이렇게 말하자 레베카가 통신 장치를 가리켰다.<br />
“기구는 마무리가 된 것 같은데, 통신 장치는 어떻게 보호 할 거지? 저기에 번개가 맞는다면 이게 모두 헛수고가 될 텐데.”<br />
“그렇군.”<br />
레베카의 말에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 다른 방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br />
“제나가 뭔가 생각해 놓지 않았을까?”<br />
헬릭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는 금세 자신이 가능성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br />
“제나에게 기대를 하다니 안쓰럽군.”<br />
레베카는 그런 헬릭이 웃기기라도 한 지, 웃음을 흘리며 통신 장치 옆으로 다가갔다.<br />
“머리를 쥐어 짜내 봐. 내가 가진 데이터 베이스에 이런 상황에 대한 내용은 없으니까.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건 너희들 몫이야.”<br />
레베카가 이렇게 말하고 통신 장치를 두드리자 헬릭이 짧은 신음 소리를 냈다. 절연 포장지를 감싸는 것으론 부족 할 것 같았다. 망으로 둘러싸서 번개를 피하는 것이 제일 적합한 방법 같았지만 그런 재료가 있는지, 그게 충분할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지,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br />
“전선으로 새장 모양의 망을 만들어 보호하는 것은 어떨까?”<br />
헬릭이 겨우 입을 떼자, 레베카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br />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어디로 흘려 보낼 생각이지?”<br />
“흘려 보내다니 뭘 말이지?”<br />
레베카의 물음에 헬릭이 반문하자 그녀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br />
“뭐긴 번개 말이지. 어디론가 흘려 보내야 그 방법이 효과가 있을 거야.”<br />
그 말에 헬릭이 다시 생각에 빠졌다.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사이 제나가 나타났다.<br />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지?”<br />
“저 통신 장치를 번개로부터 어떻게 보호할지 고민하고 있었지.”<br />
그 말에 제나가 웃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br />
“나도 어제 저녁에 그 문제에 대해 고민했었지.”<br />
고민 했었다는 말에 헬릭이 고개를 들어 제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짐짓 거만한 표정을 짓고 서서, 누군가 어서 제나가 떠올린 방법에 대해 물어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br />
“어서 말해봐.”<br />
헬릭 대신 레베카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묻자, 제나는 김이 빠진다는 듯 휴 하는 한숨을 내 뱉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br />
“기구 안 한 가운데에 고정시키는 거야. 그리고 한가지 더, 이 기구에 프로펠러를 달아서 우리 마음대로 이동 시킬 수 있게 하는 거지.”<br />
제나의 대답에 헬릭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br />
“기구 한 가운데에 고정시켜서 번개를 피하겠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프로펠러를 달아 조종하겠다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이지?”<br />
“생각해 봐. 이 비행선이 가시복어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어? 바람을 타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거나 너무 멀어서 가시복어에 신호를 보낼 수 없다거나 하면 말이지.”<br />
제나의 말에 일리가 있었지만, 프로펠러로 기구를 조종하기 위해 사용할 전파가 번개 속에서 방해를 받지 않을지 알 수 없었다.<br />
“무선 조종이 가능하다면 나쁜 생각은 아니군.”<br />
무선 조종이란 말에 제나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헬릭을 바라보았다.<br />
“무선 조종이라니? 유선 연결 할거야.”<br />
“뭐!”<br />
제나의 말에 헬릭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전선으로 연결한 기구를 번개 구름 안으로 날려보내겠다는 생각은 너무 무모하고 위험한 생각이었다.<br />
“뭐? 그랬다가 번개에 맞기라도 하면 말 그대로 끝장일 텐데.”<br />
“조종용 유선 라인 말고 낙뢰 유도용 라인을 하나 더 연결해 지상에 접지할 거야. 말하자면 다른 형태의 피뢰침을 연결하겠다는 거지.”<br />
제나의 말에 레베카가 말했다.<br />
“그런데 그 정도 길이의 전선이 있나? 그리고 그 전선의 무게를 기구가 견뎌 낼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로군.”<br />
“그 부분이 나도 걸리긴 하는데 그 외에는 별 다른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말이지.”<br />
제나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br />
“전선은 창고에 있는 것을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무게가 어떨지 모르겠군. 레베카 어때? 계산해 볼 수 있을까?”<br />
기구가 견디어 낼 수 있는 무게를 계산해 보라는 제나의 말에 레베카가 고개를 흔들었다.<br />
“계산하고 말 것도 없어. 어느 높이까지 가야 하는지에 따라 바뀔 텐데 그걸 모르니, 일단 예전에 했던 계산대로 라면 뜨기는 할 테지만 그 높이에서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통신이 가능할 지 모르겠군.”<br />
레베카가 이렇게 말하자 제나가 픽 웃더니 말했다.<br />
“그 정도면 충분해. 일단 뜬 단 말이지.”<br />
제나가 이렇게 말하고 창고 안으로 사라지자 레베카가 헬릭을 바라보며 말했다.<br />
“네가 제시한 방법이 마음에 들지만 성공 가능성은 제나의 방법이 높을 것 같은데.”<br />
“그런 것 같군, 무모해 보이긴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모해지지 않을 수 없겠지.”<br />
헬릭의 말에 레베카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 제나가 창고에서 주 종류의 전선 조각을 들고 나왔다.<br />
“이건 조종용으로 쓰고, 이걸 피뢰용으로 써야겠군.”<br />
제나의 손에 들린 전선을 보고 레베카가 말하자, 제나가 헬릭을 바라보며 말했다.<br />
“자, 이제 거의 준비가 끝난 것 같은데. 기구만 만들면 끝이야. 그러니 어서 서두르자고!”<br />
제나의 말에 세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구를 마무리하고, 그 안에 통신장치를 넣어 기구 중심에 고정하는 따위의 일 들이 남아있었다. 대부분의 작업은 정오에 끝났고 마지막으로 제나가 말한 프로펠러를 기구에 부착하는 일이 남았을 때, 레베카가 창고에 들어가 부품들을 조립해 유선으로 제어할 수 있는 프로펠러 추진장치를 만들어 가지고 나왔다.<br />
이제 남은 것은 피뢰를 위한 전선을 부착하여 날려보내는 일만 남아있었다. 날려보내기 전 기구를 지상에 고정시키고 가스를 주입해야 했기 때문에, 해지기 전까지 준비를 마치고, 다음 날 기구를 띄우기로 세 사람은 결정했다.<br />
기구를 지상에 고정시키고 상단과 좌우에 피뢰침을 전선으로 만들어 달자 기구는 그들이 조종하려고 하는 가시복어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br />
“가시가 더 달렸다면 이 놈도 가시복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br />
작업을 마친 뒤, 제나가 말했다.<br />
“가시복어를 낚기 위한 미끼겠지.”<br />
헬릭이 이렇게 말하고 피곤한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자 제나도 그 옆에 주저 앉았고, 레베카가 그 옆에 서서 완성 직전의 비행선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br />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br />
제나가 레베카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묻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구름 너머를 가리켰다.<br />
“저쪽인 것 같아. 아니 저쪽이야.”<br />
저쪽인 것 같다라는 불확실한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손가락은 그대로인 채로 대답이 바뀌었다.<br />
“내일까지는 저 위치에서 크게 이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br />
레베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며 제나가 말했다. 저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를, 또 다른 상황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br />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는 밤이 깊어갔다. 자신의 비상탈출장치에 누워 있던 헬릭이 해치를 열고 일어나 앉았다. 불안감보다는 기대감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저 비행선을 띄워 올릴 수 있게 되고 그러면 탈출에 대한 조그만 희망이라도 열리게 된다. 그 사실이 그답지 않은 조급하고 초조한 행동들을 야기시켰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마주쳤을 대 누구나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애써 위로했지만 그래도 역시 평상시와 달랐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br />
내일 저 비행선이 무사히 가시복어에 접근하여 구름층 내의 전하를 방전시켜 주기를, 헬릭은 간절히 원했다. 그것이 실패할 경우엔 어떻게 할 것인가 따위는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희망, 그것에 모든 것을 걸어볼 뿐이었다.<br />
그 때, 레베카가 컨테이너에서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 보던 그녀가 헬릭이 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물었다.<br />
“왜 안자고 있지? 잠이 오지 않나?”<br />
“음, 그렇군. 피곤하긴 한데 잠이 오지 않는군.”<br />
“억지로라도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br />
그녀는 밖으로 나와 번개 치는 구름을 계속 지켜 보았다.<br />
“미리 가시복어 위치라도 확인하는 건가?”<br />
“헬릭이 이렇게 묻자 레베카가 손가락으로 하늘 위의 한 점을 가리켰다.<br />
“가시복어라는 것의 위치는 대략 파악하고 있어. 고도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해 보는 거야.”<br />
레베카의 말에 헬릭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br />
“제나에 대해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나?”<br />
헬릭의 물음에 레베카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br />
“내 저장장치에는 그러한 정보는 저장되어 있지 않아. 하지만 짐작으로는……”<br />
안드로이드 같지않은 말투다. 거기다 짐작이라니 뭔가 잘못, 아니 이상하다고 헬릭은 생각했다.<br />
“같이 탈출한 이 후부터의 기억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야. 제나에 대한 건 모두 그 이후의 것들뿐이지.”<br />
레베카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두 여자, 아니 한 여자와 안드로이드의 관계가 묘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레베카가 다른 안드로이드와 조금 달라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헬릭이 잠을 청하기 위해 잠자리에 든 이후에도 레베카는 한참을 그렇게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br />
아침에 해가 뜨자 헬릭은 전선 다발을 기구에 연결하고 가스 주입구를 확인했다. 가스를 주입하는 사이 레베카가 나와 그를 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나도 일어나 두 사람의 행동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곤 조종용 컨트롤러를 가져와 기구의 프로펠러 장치에 연결했다. 기구에 가스 주입이 끝나가고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하자 레베카가 방향을 살피며 기구를 살짝 돌렸고, 가스 주입이 끝나자 바닥에 고정했던 끈들이 팽팽해졌다.<br />
“자 이제 띄워 올리면 돼!”<br />
헬릭이 이렇게 말하고는 끈을 풀려고 하자 제나가 조종기를 쥐고 말했다.<br />
“좋아! 행운을 빌어보자고.”<br />
그 말이 신호가 되어 끈들이 풀리고 그들이 만든 비행선이 떠올랐다. 프로펠러가 회전하며 생긴 추진력으로 방향을 잡아 날아가자 헬릭이 피뢰용 전선을 지상에 박아 놓았던 금속 막대에 연결했다. 방향이 제대로 맞아 비행선이 가시복어의 위치로 예상되는 지점에 도착하자 헬릭이 소리쳤다.<br />
“조종기 연결선을 끊어, 더 올라가서 번개에 맞으면 조종선으로도 전류가 흐를지 몰라!”<br />
하지만, 제나는 조종기를 버리지 않았다. 잠시 후 기구에 연결된 피뢰선이 풀리는 속도가 약해지자 제나가 조종용 전선을 두 손으로 잡고 당겼다. 연결부를 약하게 해 놓았는지 전선이 비행선에서 떨어지면 상승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br />
세 명은 피뢰용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비행선이 구름 속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 속에서 번개가 쳤다. 비행선에 맞았는지 피뢰용 전선이 번쩍이더니 중간에서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br />
“피뢰용으로 쓰기에는 너무 얇았나 보군.”<br />
제나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레베카 쪽에 다가가 물었다.<br />
“프로토콜을 분석해서 어떤 신호를 만들었지?”<br />
“지상으로 착륙을 유도하는 신호, 방전 유도 신호, 재 기동 신호, 통신 여부 확인 신호 기본은 이렇게 네 가지 신호고, 통신여부가 확인되면 방전 유도 후 지상 착륙하도록 프로그래밍 했지. 통신여부가 확인 되지 않을 때는 재 기동 신호와 다른 신호들을 주기적으로 발신하고……”<br />
레베카의 대답에 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br />
“그렇다면 가시복어가 지상에 착륙하거나 외부로 통신이 가능하길 바라는 수 밖에 없겠군.”<br />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헬릭이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br />
“설정된 착륙 위치는 어디지?”<br />
“컨테이너 앞 쪽이야.”<br />
레베카가 대답했다. 그 때 헬릭이 낮은 울림 같은 것을 느꼈다. 귀를 울리는 이명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게 높은 고주파 음으로 바뀌더니 구름 안에서 엄청난 범위의 섬광이 일어났다. 거대한 번개 그물이 검은 구름 안에서 번쩍이며 춤을 췄다. 그리고 잠시 후 폭음이 대지를 울렸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엄청난 폭음에 헬릭과 제나가 귀를 막았다. 그리곤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br />
“작동했군!”<br />
헬릭이 소리치자 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하늘을 주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변의 번개를 흡수하듯 구름의 바다를 헤치고 거대한 하늘의 가시 복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br />
“저게 가시 복어인가?”<br />
제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구름 속에서 나와 모습을 내보인 다시 복어는 실로 거대했다. 다른 가시 복어를 통제하는 대형 가시 복어가 낚인 모양이었다.<br />
“제대로 낚았군.”<br />
헬릭이 이렇게 소리치자 제나가 컨테이너를 가리켰다.<br />
“그럼 우리가 낚은 고기를 확인하러 가볼까?”<br />
제나가 컨테이너 쪽으로 뛰어가자 헬릭과 레베카도 그 뒤를 따라 뛰었다. 컨테이너에 도착한 제나가 의자를 가지고 나와 컨테이너 앞에 앉았고, 헬릭은 통신 장치를 가지고 나와 주파수 검색을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가시 복어가 컨테이너 쪽으로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br />
“주파수는 찾았어?”<br />
통신 장치를 조작하는 헬릭에게 제나가 물었다. 헬릭이 고개를 흔들다가 삑 하는 주파수 탐색 음을 듣고는 통신 장치로 눈을 돌렸다.<br />
“찾은 것 같은데?”<br />
헬릭이 이렇게 말하고 음성 채널을 개방했다. 그러자 통신 장치로부터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br />
“이 행성은 현재 개발 중인 상태로 외부인의 접근을 허가하지 않습니다.”<br />
“…….”<br />
위성에서 주변을 운행하는 우주선들에게 알리는 자동 반복 메시지였다.<br />
“다른 주파수는?”<br />
제나의 물음에 헬릭이 다시 다른 주파수를 찾기 위해 검색을 시작했다. 그 즈음 가시 복어가 거의 지상에 도달했다. 거대한 비행선이 지상에 착륙하기 위해 6개의 착륙용 다리를 동체 아래쪽에서 내보냈다. 비행선이 지상에 착륙하면서 육중한 소리가 퍼졌다. 제나와 레베카가 가시 복어로 다가간 사이에도 헬릭은 계속해서 주파수 찾는데 열중했다.<br />
지상에 착륙한 가시복어는 동체에 무수히 돋아있는 피뢰침들을 눕히고 조종석으로 보이는 곳의 입구를 열었다. 조종석으로 들어가려던 제나가 헬릭을 향해 소리쳤다.<br />
“자동으로 찾게 놔두고 일단 안을 확인해 보는 게 어때?”<br />
제나의 말에 헬릭이 통신장치를 자동 검색으로 전환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종석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가시복어의 조종석 안에 들어서자 먼지와 전선이 타는 냄새가 섞여 불쾌한 냄새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br />
조종석의 크기는 헬릭이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커서, 다섯 명 정도의 인원이 장비를 운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전면과 측면은 투명 재질로 되어있어 외부 상황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br />
“레베카! 모두 정상 작동하는지 한번 확인해 봐”<br />
제나의 명령에 레베카가 조종석에 앉아 장비 상태를 확인했고, 헬릭은 그 옆을 두리번거리며 통신 장치를 찾았다.<br />
“모두 정상 작동 하는 군.”<br />
레베카가 조종석에서 이렇게 소리치자 통신 장치를 찾던 헬릭이 물었다.<br />
“통신장치는? 통신도 정상 작동 하나?”<br />
헬릭의 물음에 레베카가 통신 장치를 확인 하더니 말했다.<br />
“지금 위성과 연결 중이야. 저 쪽이 통신 장비니까 앉아서 확인해봐.”<br />
레베카의 말에 헬릭이 기다렸다는 듯 레베카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연결음과 함께 위성으로 연결되자 헬릭이 구조 요청 신호를 내보냈다.<br />
“이제야 안심할 수 있겠군.”<br />
“아! 그럼 이제 자리 좀 바꿔 주겠어. 그 동안 못 들었던 소식들 좀 들어봐야겠으니까.”<br />
제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헬릭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뉴스 채널을 위성에서 검색해 연결하고는 다운로드 되는 뉴스 제목들을 살펴나갔다. 구조 신호를 발신한 뒤에도 안심할 수 있겠다던 헬릭의 표정은 더욱 더 초조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그것을 눈치 챈 레베카가 헬릭을 끌어다 가까운 의자에 앉히고 말했다.<br />
“방금 구조신호를 보내놓고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정말 봐주기 힘들군.”<br />
레베카의 말에 헬릭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때, 뉴스를 살펴보던 제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br />
“정신 사나워서 뉴스를 볼 수가 없군.”<br />
제나의 목소리에 헬릭이 겨우 다시 자리에 앉았다.<br />
“미안하군. 이상하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br />
“몇 년째 이러고 있는 우리도 가만히 있는데…… 조금만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려 봐.”<br />
“……”<br />
헬릭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뉴스 목록을 살펴보던 제나가 헬릭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큰 목소리로 제목을 읽어 내렸다.<br />
“OCP의 식민행성 계획에 대하여.”<br />
“크게 읽지 않아도 돼! 이제 진정된 것 같으니까.”<br />
“아이돌 스타의 사생활. 꽤 매력적인 기사지만 너무 오래돼서 재미는 없겠는데……”<br />
헬릭이 말렸지만 제나는 기사 읽기를 계속했다. 제나 덕분에 헬릭이 안정을 찾았는지 침착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의자에 앉아 중얼거렸다.<br />
“그래. 이제는 이 비행선을 타고 올라가 통신하는 방법도 있으니까.”<br />
헬릭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제나가 뉴스를 읽어 내려가던 것을 그만두고, 레베카를 보며 말했다.<br />
“모든 게 정상이니까 낚은 기념으로 날아볼까?”<br />
제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헬릭이 되묻는 사이, 제나는 이미 출입구의 해치를 닫고 있었다.<br />
“레베카 이륙한다.”<br />
헬릭은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며, 레베카에게 명령을 내리는 제나의 목소리가 다른 때와는 사뭇 다르다고 생각했다. 익숙해 몸에 배인 어투라고 생각했다.<br />
제나의 명령에 레베카가 조종장치를 만지자, 작은 엔진음과 함께 동체가 지상으로부터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헬릭의 시선이 자연스레 창 밖을 향했다. 지상에서 서서히 멀어지던 비행선이 구름 속에 들어가자, 주위가 어두워지며 조종실 내의 조명이 밝아졌다. 천둥소리가 크게 들려야 할 텐데, 방음이 잘 되어 있는지 지상에서 보다 더 작게 들렸다. 헬릭이 비행선에 내리 꽂히는 번개에 시선을 옮긴 사이, 레베카가 조종석의 패널을 바라보며 말했다.<br />
“방전시켜 볼까? 수치가 꽤 올라간 것으로 나오는데.”<br />
“좋아. 방전시켜!”<br />
제나의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번개 그물이 비행선을 덮쳤다. 헬릭은 마치 자신의 몸이 번개 한 가운데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br />
“우와! 대단한데. 엄청나.”<br />
제나가 방전이 끝나자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대한 번개 그물에서 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던 헬릭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br />
“정말 대단하군.”<br />
헬릭이 제나의 말에 대답하자, 제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조종석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br />
“이제 이걸로 이동도 가능하니까. 만약에 실패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 거야.”<br />
“그렇군.”<br />
헬릭이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던 부분을 제나가 알려주자, 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br />
“레베카 이제 내려갈까?”<br />
제나가 헬릭의 어깨를 두드리고 이렇게 말하자 레베카가 대답 없이 조종패널의 레버를 조작했다. 그렇게 짧은 비행을 마치고 지상에 착륙하자 헬릭이 맨 처음 비행선에서 내려 컨테이너에서 비상식량박스를 꺼내 가지고 나왔다. 금세 다 먹어 치우고 컨테이너의 의자에 걸터앉아 통신장치의 주파수 검색을 멀리서 지켜보던 그는 한참 뒤, 제나와 레베카가 컨테이너로 들어오자 말했다.<br />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지?”<br />
“응, 좀 안정이 된 것 같네.”<br />
레베카의 말에 헬릭이 자신의 비상탈출 장치에서 저격용 라이플을 들고 나와 컨테이너의 테이블 앞에 앉았다.<br />
“뭐 하려는 거지?”<br />
제나의 헬릭의 행동을 보며 묻자, 헬릭이 라이플을 분해하며 말했다.<br />
“기다려 보려는 거야.”<br />
헬릭이 라이플의 소제를 시작하자 제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레베카 만이 잠시 서서 헬릭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그녀도 밖으로 나가버렸다. 모든 것이 성공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은 불안한 시간을 헬릭은 자신의 소총을 청소하며 보내려 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으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그 사이에도 통신 장치는 여전히 주파수를 검색하고 있었다 .</p>
<p>일주일이 지났다. 헬릭은 자신의 무기 케이스에 있는 모든 무기들을 꺼내 두 번씩 소제를 마쳤고, 제나와 레베카는 매일 아침 가시복어를 타고 나갔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주변에 다른 구조물이 있는 지 찾기 위해서였지만 별 다른 성과는 없는 것 같았다. 주파수 검색은 3일 만에 그만 두었고, 대신 가시복어에서 위성을 통해 구조신호를 보내기로 했다.<br />
헬릭이 테이블 위에 라이플을 올려놓고 컨테이너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시복어의 작동 때문인지 번개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어두웠다. 제나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밖에 세워 놓았던 통신 장치에 다가갔다.<br />
“뭐 새로운 거라도 찾았나?”<br />
헬릭의 물음에 화면에 나타난 제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반응은 이제껏 제나에게선 보기 힘든 보기 힘든 반응 이었다.<br />
“기운 없어 보이는 군.”<br />
“뭔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br />
일 주일간 헬릭이 침착해진 데 비해 제나는 처음과 달리 점점 기운이 빠져가고 있었다.<br />
“왜 이렇게 기운이 빠져 버렸는지 모르겠군?”<br />
“온통 회색 구름뿐이라 우울해지는 모양이야!”<br />
“그럴지도 모르겠군.”<br />
제나의 말에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br />
“위성에서도 별 반응이 없었나 보군.”<br />
“음 그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주기적으로 구조신호는 보내고 있어! 그렇지 레베카!”<br />
제나가 레베카를 보며 묻자 화면에 레베카의 얼굴이 떠올랐다.<br />
“주변을 지나는 우주선이 관심을 가져 준다면 머지 않아 반응이 있을 거야. 신호는 자동 발신 되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br />
레베카가 이렇게 말하고 통신 화면에서 사라지자 곧이어 제나가 손을 흔들며 연결을 끊었다. 헬릭이 연결 회선을 끊고 컨테이너로 돌아가려고 할 때 통신 장치에서 작게 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소리에 헬릭이 통신 장치로 다가가 수신된 메시지를 확인하자 젊은 남자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br />
“구조 신호를 확인하여 구조임무를 시작 하였습니다. 메시지 도착 삼일 후에는 도착하리라고 예상됩니다.<br />
앞 부분의 메시지는 유실되어 있었지만 남자의 옷차림으로 보아 주변을 지나던 순찰대 같았다. 헬릭이 기쁜 소식을 제나에게 알리려는 순간, 제나로부터 통신이 연결됐다.<br />
“방금 구조 신호에 대한 회신을 받았어!”<br />
제나의 흥분한 표정에 헬릭이 웃으며 대답했다.<br />
“이 쪽에서도 방금 확인했어.”<br />
“이제 지겨운 구름을 계속 보지 않아도 되겠군. 야옹이도 컨테이너에 데려다 놓아야겠어.”<br />
“녀석을 데려가려고?”<br />
제나가 애완용 호랑이 이야기를 하자 헬릭이 되물었다.<br />
“그 놈은 애완용이라 사람이랑 같이 지내는 편이 행복할거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데려와야겠어.”<br />
제나가 이렇게 말하고 통신을 끊자 헬릭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 소총을 정리해서 세워 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곤 큰 소리로 한참을 웃어댔다. 지금까지의 불안이 일시에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와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사나흘만 더 기다리면 이 버려진 행성에서 탈출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지금까지의 고민들이 한 순간에 하찮은 것이 되어 버렸다. 잠시 후, 제나와 레베카가 돌아오자 헬릭이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br />
“이제 우리 모두 안심할 수 있겠군.”<br />
“주변에 아무 것도 없어서 불안했는데 정말 다행이야. 완전히 포기하기 직전이었어.”<br />
제나가 이렇게 말하며 웃자, 레베카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br />
“인간들은 왜 그렇게 성급하게 판단해서 제멋대로 고민하는 거지?”<br />
레베카의 말에 제나와 헬릭이 서로를 바라보며 또 한번 크게 웃었다.<br />
“그럼 우리도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겠지?”<br />
제나가 이렇게 말하고 컨테이너 안을 둘러보았다. 제나의 표정에 마치 정든 고향집을 떠나는 듯 아쉬움이 가득한 것을 보고 헬릭이 물었다.<br />
“뭔가 많이 아쉬워하는 표정이군.”<br />
“그렇게 보였나? 오래 지낸 곳이라 그런 표정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여기서 떠나는 걸 나도 너만큼이나 바라고 있는 걸.”<br />
제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br />
제나가 올라가고 나자, 헬릭도 자신의 무기 케이스를 꺼내 정리했다.</p>
<p>구조대로부터의 두 번째 연락은 5시간 후에 도착했다. 인원과 조난 일시 등을 묻는 몇 개의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헬릭은 답변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송신했다. 하지만 구조대와의 통신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 알 수 없었다.</p>
<p>다음 날 제나는 야옹이를 컨테이너에 데려다 놓았다. 헬릭이 같이 가려고 했지만, 구조대에서의 메시지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기 대문에 누군가 컨테이너에 남아 응답을 해 주어야 했다.<br />
하늘을 올려다 보며 구조대와 연락을 취한 지 이틀이 더 지났다. 기다리는 시간은 아무런 희망 없던 때보다 더욱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헬릭이 구조대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리며 컨테이너 앞을 어슬렁거리다, 마침 그 앞에서 앞발을 길게 뻗어 기지개를 펴는 거대한 고양이를 발견하고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사람과 가까이 있게 되어선지 녀석의 행동에서 예전 돼지를 물어뜯던 맹수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헬릭은 방사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녀석의 모습에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돼지를 물어뜯을 때의 오싹한 이빨과 대조되는 한가롭게 비상식량 박스를 핥고 있는 녀석의 혓바닥이 괜스레 처량해 보였다.<br />
제나와 레베카는 가시복어를 무인작동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놓기 위해 시험비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음에 이 곳에 불시착할 지 모를 재수없는 인간을 위한 작은 선물이라고 거창하게 말했지만, 구조대의 도착까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핑계라는 것을 헬릭은 잘 알고 있었다. 헬릭이 야옹이가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머리 바로 위에서 가시복어가 섬광을 일으키며 구름층에서 빠져 나왔다. 지상에서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의 방전으로 인한 폭음 때문에 헬릭이 순간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나가 일부러 헬릭을 놀래주기 위해 장난을 친 것이 분명했다. 가시복어가 착륙하는 사이 헬릭은 눈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상기된 얼굴로 저격 라이플을 어깨에 매고는 가시복어 쪽으로 다가갔다.<br />
“깜짝 놀랬지!”<br />
제나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가시복어에서 내렸다. 헬릭은 대답 대신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쳐 가시복어에 올라탔다.<br />
“바통터치야. 괜한 장난으로 내 신경을 거슬린 벌이라고 생각해!”<br />
헬릭이 이렇게 말하고 가시복어의 탑승구에 다다르자 조종석에서 패널을 조작하고 있던 레베카가 고개를 돌렸다.<br />
“오늘 비행은 이걸로 끝이야.”<br />
“괜찮아. 넌 내려도 돼. 혼자 좀 떠다녀보고 싶은 거니까.”<br />
헬릭의 말에 레베카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br />
“조종이 어렵진 않지만 무인조종을 테스트 중이니까 자리에 앉아서 비행 시스템의 동작만 확인하면 돼. 착륙은 시퀀스 업데이트만 하면 될 거야.”<br />
레베카의 말에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가자 헬릭은 탑승구를 닫고 자동비행 시퀀스를 작동했다. 이내 가시복어가 이륙하자 헬릭은 다리를 쭉 펴고 조종석에 앉아 창 밖을 주시했다. 꽤 편안한 기분이 되어 날카로웠던 신경을 누그러뜨리고 통신장치 쪽에 손을 가져갔다. 지상에서 제나나 레베카가 대기하고 있을 테지만, 혹시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잠시라도 통신장치를 꺼놓고 있을 수 없었다. 화도 가라앉히고 좀 느긋하게 쉴 생각으로 가시복어에 올라탔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헬릭이 통신장치를 켜자 제나가 비행 중에 듣고 있었던 음악이 흘러나왔다. 언제 유행하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음악을 끄고, 구조대와의 통신 채널로 통신장치를 맞추고 조종석에 앉았다. 위치만 바뀌었을 뿐 지상에서와 별 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나마 기체가 흔들린다는 이유로 소총 소제를 할 수 없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br />
통신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을 줄이기 위해 볼륨 버튼에 손을 가져간 순간 가시복어가 번개를 방전시키면서 스피커에서 폭음이 울렸다. 제나와 레베카가 자동 방전 시키도록 설정한 모양이었다. 잠시 놀라 멈춰있던 헬릭이 잡음이 섞인 통신장치의 볼륨을 재설정 하려는데, 방금 전의 방전이 영향을 주었는지 통신 회선의 잡음이 증가하더니 순간 사람목소리와 비명 비슷한 것으로 변하다 조용해졌다.<br />
방금 전에 자신이 들은 소리가 진짜 사람의 비명인가 하는 생각에 헬릭이 다시 볼륨을 높여보았으나 통신 장치는 조용하기만 했다. 설마 구조대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 불안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제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br />
“원래 이렇게 통신장치에 잡음이 많이 났어? 방금 전에는 너무 커서 사람 비명소리인 줄 알았다고.”<br />
그 말에 정말 비명이었나 하는 생각에 순간 헬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조대에서 저런 비명이 발생할 사건이란 것들은 어느 것을 떠올려 보아도 모두 발생확률이 낮은 것들뿐이었다. 정말 운이 없어서 구조대가 어떠한 것으로부터 공격 당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 우리에게 미리 연락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br />
헬릭이 아무 말도 없자 제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br />
“왜 이렇게 조용한거야?”<br />
“아냐! 아무것도.”<br />
헬릭이 불안감을 감추며 이렇게 이야기 했을 때 마침 구조대로부터의 통신이 들어왔다.<br />
“곧 도착 예정이다.”<br />
짧은 한마디에 헬릭이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답하려는 순간 제나가 지상에서 먼저 답하는 바람에 헬릭은 대답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제나가 한 참을 떠들고 나서야 통신회선이 다시 조용해졌다. 의자에 앉아 제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헬릭은 아주 잠시 목소리가 달랐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자신이 너무 민감한 탓으로 돌리며 잊어버렸다.<br />
헬릭이 조종석에 앉아 창 밖을 주시하는 사이 몇 번인가 제나가 심심함을 달래려는 듯 말을 걸었지만 헬릭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즐기고 싶었다.<br />
마지막 수신 이후 구조대로부터의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대해 헬릭은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의 불안함이 괜한 걱정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 제나와 레베카 대신 헬릭이 가시복어를 타는 시간이 늘어났다. 마지막 연락이 있고 3일이 지나서야 무신경하던 제나가 입을 열었다.<br />
“뭐야. 이 자식들 연락도 없고, 우리에 대해서 잊어버린 거 아냐?”<br />
레베카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나가 답답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더니 결국 의자를 쓰러뜨리며 일어나 구름에 선체 반이 가리워져 있는 가시복어를 바라보았다.<br />
“나보다 더 호들갑 떨 줄 알았더니 조용한데.”<br />
레베카의 반응이 없자 제나는 컨테이너 밖으로 나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야옹이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녀석도 제나를 흘깃 쳐다 보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느릿한 걸음으로 컨테이너 뒤쪽으로 사라져 버렸다.<br />
“이제 저 고양이까지 날 무시하는 군.”<br />
제나가 바닥에 침을 뱉고는 통신장치를 들어 헬릭을 불렀다.<br />
“뭐하고 있는 거야. 내려와! 여기는 너무 따분해! 나랑 자리 바꾸자고.”<br />
“내가 편하게 있는 꼴을 못 보는 군. 기다려, 안 그래도 내려가려던 참이었으니까.”<br />
헬릭이 대답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가시복어가 서서히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제나가 묘한 승리감에 젖은 표정을 짓는 순간, 가시복어의 뒤 편 구름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제나의 표정에 활기가 차 올랐다.<br />
“봐! 구조대다.”<br />
제나가 레베카를 향해 소리치자 레베카가 평소와 다름없는 움직임으로 걸어 나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지상에 가까워진 가시복어 위로 거대한 우주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br />
타원형에 검고 투박한 형태의 선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나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br />
“제나! 도망쳐! 구조대가 아……”<br />
잡음이 잔뜩 섞인 헬릭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제나의 눈에 우주선 하부에 장착된 무기가 보인것도 그 때였다. 우주선을 향해 번개가 집중되는가 싶더니 작은 섬광과 함께 바닥에 닿으려는 가시복어가 불길에 휩싸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제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불타오르는 가시복어를 바라보던 레베카가 제나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br />
“도망쳐야 해.”<br />
그 말에 제나가 정신을 차리고 바이크 쪽으로 달려갔다. 일단 숲으로… 제나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제나가 레베카를 바이크에 태우고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주선으로부터 가시복어 크기의 상륙선이 떨어져 나와 제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br />
제나의 바이크가 속도를 높이자 상륙선도 고도를 낮추고 바짝 붙었다. 제나가 그걸 따돌리기 위해 바이크로 크게 선회하자 뒤 쪽에 앉아있던 레베카의 몸이 중심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뒤이어 상륙선에서 발사된 무기에 의해 제나 앞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그 충격으로 제나의 몸이 크게 떠올랐다가 앞 쪽에 떨어졌다. 먼저 일어난 레베카가 제나 쪽으로 달려가 상태를 살피는 사이 상륙선이 그들 앞에 착륙했다.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기절한 제나를 레베카가 안아 올리자 상륙선의 해치가 열리며 안에서 무기를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남자 둘에 여자 여섯이 총을 겨누며 둘을 에워쌌다.<br />
“왜 도망치는 거야? 조난자를 구해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br />
마지막에 상륙선에서 내린 남자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자 레베카가 대답했다.<br />
“구조대는 식별코드가 확인되지 않는 우주선을 운용하지 않아.”<br />
레베카의 대답에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는 턱에 손을 가져가더니 레베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br />
“인간이 아닌가?”<br />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옆의 여자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br />
“인간형 안드로이드. 제품번호 식별되지 않음.”<br />
“아~ 역시. 그럼 저기 기절해 있는 쪽만 인간이로군.”<br />
남자가 이렇게 말하고는 제나 쪽을 바라보았다.<br />
“신원 확인해 봐. 혹시라도 대단한 부잣집에서 잊어버린 딸일지도 모르니까. 행색을 보아서는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이긴 하지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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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Hellic &#8211; Abandoned Planet #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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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4 Jan 2012 10:25:17 +0000</pubDate>
		<dc:creator>김 승엽</dc:creator>
				<category><![CDATA[단편소설]]></category>
		<category><![CDATA[소설과 시]]></category>
		<category><![CDATA[Hellic]]></category>
		<category><![CDATA[SF]]></category>
		<category><![CDATA[단편]]></category>
		<category><![CDATA[소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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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연재글 목록 보기 &#187; 다음날, 헬릭은 한낮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지난 밤, 그다지 과음을 하진 않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머리가 깨질 듯 아파, 눈 안쪽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제나가 가져온 포도주 맛이 조금 이상하긴 했는데……” 헬릭이 캡슐을 열고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을 때 레베카가 캡슐 옆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비상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unfusion.kunsan.ac.kr/word/archive/1640#SID1640_1_tgl" title="See post to check out spoiler" class="internal">연재글 목록 보기 &raquo;</a></p>
<p>다음날, 헬릭은 한낮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지난 밤, 그다지 과음을 하진 않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머리가 깨질 듯 아파, 눈 안쪽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p>
<p>“제나가 가져온 포도주 맛이 조금 이상하긴 했는데……”</p>
<p>헬릭이 캡슐을 열고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을 때 레베카가 캡슐 옆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비상 탈출 장치에 부착되어 있던 커다란 낙하산 모듈을 꺼내든 채 헬릭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p>
<p>“숙취로 인한 두통이군!”</p>
<p>헬릭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베카가 컨테이너 안을 가리켰다.</p>
<p>“들어가봐. 안에 숙취로머리를 쥐어짜는 인간이 또 하나 있으니까.”</p>
<p>레베카는 이렇게 말하고는 묘한 웃음을 띠었다. 헬릭이 일어나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자 레베카의 말대로 제나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p>
<p>“진통제 같은 거 있어?”</p>
<p>헬릭의 물음에 제나가 손을 내저었다. 짐작은 했지만 이 두통이 가실때까지 참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헬릭은 제나 앞에 비스듬히 놓인 다른 의자에 앉아 말했다.</p>
<p>“아무래도 어제 그 포도주가 이상했던 것 같아. 따온 포도로 만들었을 거라고 짐작은 하지만 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p>
<p>“실컷 마셔놓고 딴 소리하는 거야!직접 만든 술인데도 제대로 취하게 해줬잖아. 그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야! 덕분에 이런 숙취도 느껴보잖아.”</p>
<p>“그래! 확실히 취하긴 했지.”</p>
<p>헬릭이 이렇게 말하며 어이없다는 듯 웃자, 제나가 따라 웃더니 머리가 온통 헝클어진 채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p>
<p>“어제 내가 한 말 기억해?”</p>
<p>제나의 물음에 헬릭이 어떤 말을 의미하는지 몰라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p>
<p>“네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말.”</p>
<p>“아! 그거 말이군. 그래 기억하고 있는데 왜?”</p>
<p>헬릭의 대답에 제나가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p>
<p>“왜긴 들어주려고 그러는 거지. 물론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p>
<p>“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p>
<p>제나의 말에 헬릭은 집중하지 못하고 귀찮다는 듯 이렇게 내뱉었다. 다만, 어젯밤 자신이 제나의 말을 다른 의미로 오해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속으론 잠시 안도했다.</p>
<p>‘어젯밤 그녀를 따라 들어갔더라면 큰일 날 뻔 했군.’</p>
<p>헬릭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제나가 다시 말했다.</p>
<p>“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소원 아냐?”</p>
<p>그 말에 헬릭이 눈을 크게 떴다.</p>
<p>“그럼 빠져 나갈 방법을 알고 있다는 거야?”</p>
<p>“이제 제대로 알아 들었나 보군. 말했잖아 잘 될지는 모른다고.”</p>
<p>제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헬릭의 놀란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느긋한표정의 제나와는 반대로 헬릭의 표정은 놀람과 원망이 섞인 묘한 것으로 변해있었다.</p>
<p>“방법이 있었으면서 왜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거지?”</p>
<p>헬릭의 표정이 바뀐 것을 알아 챈 제나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p>
<p>“왜 화를 내는 거지? 여기서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숨겼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레베카도 거의 수리 됐고, 네가 타고 온 비상 탈출 캡슐 덕에 가능성이 높아지긴 했지만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말을 안 했던 거지 숨긴 건 아니라고!”</p>
<p>흥분한 제나의 목소리에 헬릭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였지만 처음에 그 가능성에 대해 귀띔이라도 해주었다면 연결되지 않는 통신장치를 붙들고 씨름할 필요도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하거나 자극하는 것이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꾹 참았다.</p>
<p>“알겠어. 내가 오해 했군. 그런데 그 방법이 대체 뭐지?”</p>
<p>헬릭이 마음을 가라 앉히고 묻자, 제나가 의자를 끌고 문 앞에 가 앉은 뒤, 구름이 가득 덮인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p>
<p>“하늘을 잘 봐.”</p>
<p>헬릭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번개가 수시로 번쩍이는 하늘은 바닥에 깔린 이끼와 함께 어울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p>
<p>“왜 지상으로는 번개가 떨어지지 않을까?”</p>
<p>“그야 고도가 매우 높은 곳에서 발생하기 때문이겠지.”</p>
<p>헬릭이 대답하자 제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p>
<p>“번개의 발생 빈도에 비해 들리는 천둥소리가 작긴 하지만 간혹 큰소리가 들리는데도 바닥에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잘 보라고 저 번개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한 점을 향하는 것 같지 않아?”</p>
<p>제나의 말에 헬릭이 번개가 치는 모양을 확인했지만, 제나의 말대로 한 점을 향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헬릭이 대답 없이 하늘을 주시하자 제나가 자신의 PDA를 꺼내 헬릭에게 내밀었다. 헬릭이 그것을 받아 화면을 확인했을때, 거기에는 흡사 성난 가시복어 같은 타원형 물체의 형상이 떠올라 있었다.</p>
<p>“생긴 것처럼 이름도 가시복어(Porcupinefish)야. 지상에 떨어지는 번개를 막기 위해 띄워 올린 비행선.”</p>
<p>제나의 말에 헬릭이 PDA를 조작해 다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낙뢰를 흡수해 동력으로 활용하고 구름을 생성하는 기능에 대한 내용이 PDA에 나와 있었다.</p>
<p>“저 번개 구름은 우리가 갔던 사냥터 너머의 해양에서 생성되는 것 같은데 저렇게 빈틈없이 유지 된다는 건 그 비행선이 여전히 동작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완벽하게는 아닌것 같지만.”</p>
<p>헬릭은 PDA를 내리고 다시 하늘을 살폈지만 구름 층이 두터워서 비행선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p>
<p>“그 PDA에 나온 것은 소형이고, 그 소형을 관리하는 대형 가시복어가 있어.”</p>
<p>헬릭이 하늘을 주시하는 동안 제나가 이야기를 계속했다.</p>
<p>“보이지 않지만 번개의 형태를 보면 대강의 위치는 짐작할 수 있지. 한 동안 지켜봐야 하겠지만.”</p>
<p>“이 컨테이너에서 자료들을 발견한 건가?”</p>
<p>헬릭이 PDA를 다시 제나에게 건네주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p>
<p>“이 곳이 저 가시복어와 토양 환경 조성용 차량을 관리하던 곳 같아. 가시복어는 직접 조종하거나 한 것 같진 않고 수리나 작동 상태를 파악하는 정도 같지만.”</p>
<p>제나의 말을 듣자 컨테이너와 비상식량의 존재에 대해 가졌던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 가시복어란 비행선과 탈출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p>
<p>“비행선에 대한 건 잘 알겠는데, 대체 어떻게 탈출 한다는 거지?”</p>
<p>헬릭의 물음에 제나가 머리를 쓸어 내리며 대답했다.</p>
<p>“내 생각에 가시복어가 정상 작동을 해서 단순히 공중에 떠 있는 피뢰침이 아니라 구름 내 전하의 방전을 적극적으로 유도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신 장치로도 위성과 통신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p>
<p>“하지만 어떻게 정상 작동 시킨다는 거지. 어떤 고장이 났을지도 모르고, 더구나 위성과 통신도 안 되는데 번개 한가운데 떠 있는 비행선을 무슨 수로 조종한다는 건지 모르겠군.”</p>
<p>헬릭이 이렇게 대답하고는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제나와의 대화로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p>
<p>“여기서 찾아 낸 자료에는 위성에서 가시복어로 보내는 통신 프로토콜에 대한 자료와 명령어들도 있어. 레베카가 분석한다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문제는 어떻게 가시복어에 명령을 내리는가 하는 건데. 그 동안 내가 생각했던 건 명령어를 발신하는 비행선을 띄우는 거였어.</p>
<p>제나의 말에 헬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p>
<p>“비행선을 만들 수 있다면 바로 통신위성에 연결해서 구조요청을 보내면 되지, 어째서 가시복어를 이용하려는 거지?”</p>
<p>“그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럴 경우 회신을 받지 못해. 띄워 올린 비행선에 구조 신호나 음성을 저장해 그게 제대로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지. 그리고 네가 방금 전에 말한 대로 우리가 띄울 비행선이 구름 안에서 위성과 통신이 가능하다는 확신도 없고. 구름 안이긴 하지만 거리가 가까운 가시복어 쪽이 확률이 더 높지. 그리고 가시복어의 경우에는 최악의 상황에선 우리가 직접 가시복어를 타고 올라가 통신시도를 해볼 수도 있는 차선책이 가능해지지.”</p>
<p>제나의 대답에 헬릭이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갔다. 두통 때문에 그녀의 방법을 대신할 만한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p>
<p>“두통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군! 그럼 비행선은 어떻게 만들 거지?”</p>
<p>“일단 너는 좀 쉬고 있어. 지금 얘기해도 소용 없을 것 같으니까. 난 레베카를 좀 보고 올 테니 이따 다시 이야기 하자고.”</p>
<p>제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두통이 가시기라도 했는지 들어올 때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p>
<p>“고맙다는 말을 못했군.”</p>
<p>제나가 나가고 난 뒤, 헬릭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는 생각 때문에 줄곧 본심과는 다른 비관적인 물음만 던졌었지만, 그녀가 제시한 방법으로 한 가닥 희망이 생긴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p>
<p>헬릭은 잠을 더 자면 두통이 좀 가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어느 새 제나의 낙천적인 성격이 전염이라도 된 것일까? 탈출에 대한 가능성으로 흥분되었을 텐데도 술 때문에 숙면을 취하지 못했던 헬릭은 금세 잠에 빠지고 말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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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Hellic &#8211; Abandoned Planet #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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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5 Jan 2012 13:49:13 +0000</pubDate>
		<dc:creator>김 승엽</dc:creator>
				<category><![CDATA[단편소설]]></category>
		<category><![CDATA[소설과 시]]></category>
		<category><![CDATA[Hellic]]></category>
		<category><![CDATA[SF]]></category>
		<category><![CDATA[단편]]></category>
		<category><![CDATA[소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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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연재글 목록 보기 &#187; 컨테이너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자, 레베카가 낡은 정비복을 입고 나타나 말했다. “또 이것 저것 귀찮게 하겠군.” “저 돼지 다리들 손질 좀 해!” 제나가 레베카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돼지 다리를 가리키며 말하자 레베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헬릭은 분명 상황에 따라 감정을 시뮬레이션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로봇이었을 때에 알 수 없던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unfusion.kunsan.ac.kr/word/archive/1636#SID1636_1_tgl" title="See post to check out spoiler" class="internal">연재글 목록 보기 &raquo;</a></p>
<p>컨테이너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자, 레베카가 낡은 정비복을 입고 나타나 말했다.</p>
<p>“또 이것 저것 귀찮게 하겠군.”</p>
<p>“저 돼지 다리들 손질 좀 해!”</p>
<p>제나가 레베카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돼지 다리를 가리키며 말하자 레베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헬릭은 분명 상황에 따라 감정을 시뮬레이션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로봇이었을 때에 알 수 없던 표정 변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어 미소를 지었다.</p>
<p>레베카가 돼지 다리를 들고 사라지자, 이번에는 헬릭에게 땔감이 든 가방을 건네며 말했다.</p>
<p>“전기로 조리가 가능하지만, 오늘은 직접 구워보기로 했어. 불 잘 피우라고!”</p>
<p>제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포도를 안고 컨테이너 안으로 사라졌다. 헬릭은 가방을 뒤집어 땔감을 바닥에 쏟아놓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다가 무기케이스 안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대신, 구난 구호 세트에서 꺼냈던 마그네슘 파이어 스타터를 꺼냈다. </p>
<p>먼저 대검으로 나뭇가지를 깎아 불이 붙기 쉽게 해놓고는, 말라 부스러진 나뭇잎을 함께 모아 부싯깃을 만든 뒤에 파이어 스타터를 대검으로 긁어 마그네슘 가루를 만들어 모았다. 그리고 파이어 스타터의 부싯돌을 세게 내리그어 불꽃을 일으키자 마그네슘 가루에 불꽃이 반응하여 바짝 붙여 놓았던 부싯깃에 불이 붙었다. 불이 어느 정도 피어 올랐을 때, 레베카가 손질한 고기를 꼬챙이에 끼워 가지고 나타났고, 헬릭은 그것을 받아 모닥불 주위에 세워 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나가 병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p>
<p>“원래는 위스키만 꺼내올 생각이었는데, 포도주도 한 번 마셔보자고.’</p>
<p>벌써 마시고 나왔는지 얼굴이 상기된 제나에게서 헬릭이 위스키 병을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들이키자 위스키 향이 입 안에 퍼지며 목이 기분 좋게 타 들어갔다. 그리곤 자신도 모르게 레베카에게 병을 건네자, 레베카가 그것을 받아 아무 말 없이 제나에게 건넸다.</p>
<p>어느새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고, 그렇게 세 명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 앉았다. 레베카가 익은 고기들을 접시 위에 올려놓자 제나가 얼른 그것을 입에 집어넣었다.</p>
<p>“이렇게 직접 불에 구우니까 맛이 색다른데, 어서 먹어봐.”</p>
<p>제나가 헬릭에게 권했지만, 그는 대신 위스키만 한 모금 더 들이켰다.</p>
<p>“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잖아? 먹을 것도 쌓여있고, 수도시설까지 있어서 물도 부족하지 않고, 게다가 말동무 해줄 여자에 부려 먹을 안드로이드까지 있으니 조난이 아니라 휴양이라고 불러도 손색 없지 않아?”</p>
<p>“휴양까지는 아니지만, 극한 상황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p>
<p>“그런데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앉아서 아까운 술만 축 내는 거야? 고기나 먹으라고!”</p>
<p>제나가 이렇게 말하며 고기 한 점을 헬릭의 입에 밀어 넣었다. 제나의 손에 묻었던 기름기 때문에 헬릭의 입 주변이 모닥불 빛에 번들거렸다.</p>
<p>“군인…… 뭐 그런 거였나 보던데?”</p>
<p>갑작스런 물음에 고기를 씹고 있던 헬릭이 겨우 삼키고 말했다.</p>
<p>“비슷한 거였지.”</p>
<p>“그럴 것 같았어. 저런 장비를 들고 다니는데다, 숲에서는 길도 표시해 놓고, 게다가 불도 피울 줄 알고 말이지.”</p>
<p>숲에서 나무에 냈던 표식을 알아차리고, 불 피우는 모습도 지켜봤던 모양이었다.</p>
<p>“그런데 어쩌다 저런 걸 타고 여기에 오게 된 거야?”</p>
<p>“우주 여객선이 납치 당해서 탈출했다 깨어보니 여기더군. 그런데 넌 어떻게 여기 있게 된 거지?”</p>
<p>“말하지 않았나? 우주선이 공격 당해서 여기 오게 됐다고.”</p>
<p>“직업이 뭐였는데 공격 당한 거야? 레베카도 원래 안드로이드의 이름이 아닌 것 같던데.”</p>
<p>헬릭의 물음에 제나가 잠시 멈칫하는 것 같더니 이내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p>
<p>“작은 수송선의 엔지니어였어. 나도 왜 공격 당했는지는 몰라. 급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레베카는 내가 멋대로 붙인 이름이긴 하지. 저 안드로이드 원래 주인의 이름이 레베카였던 것 같더라고. 내가 수리해서 꽤 기억을 찾긴 했지만, 같이 탈출해서 여기 왔을 때는 완전히 망가져 있어서 자기 이름도 몰랐으니까.”</p>
<p>별로 의심할 부분이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레베카를 처음 불렀을 때 반응이 떠올라 헬릭은 쉽게 납득되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때,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p>
<p>“오늘 내 원래 하드웨어의 수리를 마치고 나서야 두뇌 모듈이 정상작동을 해서 내 이름이 떠올랐어. 원래 이름은 이드라고, 주인이름도 레베카가 아니고, 하긴 항상 깨어날 때 마다 제멋대로 이름을 붙였으니, 레베카도 분명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름이었겠지.”</p>
<p>“항상 작동 중이지 않았던 건가?”</p>
<p>헬릭이 묻자 레베카가 얼굴을 찌푸렸다.</p>
<p>“배터리 전해액이 유실돼서 거의 꺼져 있었다고, 저 여자가 말동무가 필요하거나 일을 시킬 때를 제외하고 말이지.”</p>
<p>“이드라고? 기억해뒀다가 다음에는 이드로 불러줄게.”</p>
<p>제나가 웃으며 말하자 레베카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p>
<p>“이제 전처럼 마음대로 전원을 끌 수 없을 걸.”</p>
<p>헬릭은 두 여자, 아니 한 여자와 안드로이드의 말다툼을 지켜보며 웃다가 말했다.</p>
<p>“그럼, 그냥 레베카로 부르지.”</p>
<p>“맘대로 해! 고기도 다 구워졌으니 난 더 필요 없겠지”</p>
<p>레베카가 이렇게 말하고는 컨테이너 안으로 사라졌다. 레베카가 사라지자 포도주를 들이킨 제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p>
<p>“나 소원이 한가지 있는데……”</p>
<p>“소원?”</p>
<p>헬릭이 되묻자, 제나가 다시 포도주를 마시고 말했다.</p>
<p>“한 번 안아볼 수 있을까?”</p>
<p>“뭐?”</p>
<p>예상치 못했던 말에 헬릭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p>
<p>“혼자 지낸 시간이 길어서, 체온, 박동 아니 사람을 느껴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싫다면 할 수 없고……”</p>
<p>제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그녀의 모습에 헬릭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망설였다. 그리곤 대답 대신 그녀 쪽으로 다가가 품에 안았다. 생각보다 작은 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나가 헬릭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대고 말했다.</p>
<p>“고마워! 이 소리가 듣고 싶었어.”</p>
<p>다른 때라면 그녀를 안거나 하지 않았을 거라고, 술기운 때문일 거라고 헬릭은 생각했다. 그러나 헬릭도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자신을 휘감고 있던 불안감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p>
<p>“원래 이상한 사람은 아니야. 누군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기뻐서, 사람을 만나본 게 오랜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줘.”</p>
<p>헬릭의 품에 안겨 제나가 중얼거렸다. 그리곤 이내 헬릭에게서 벗어나 눈가를 소매로 훔치고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p>
<p>“내 소원을 들어줬으니까 나도 당신 소원을 들어줄게.”</p>
<p>어느새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간 제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헬릭은 모닥불에 앉아 그녀의 마지막 말을 되씹다가 남은 포도주를 벌컥 들이키고는, 통신장비의 상태를 확인하려다가 포기하고 컨테이너 옆에 있는 개인용 비상 탈출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제나를 안았을 때 느꼈던 체온과 술기운,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말의 여운 때문에 잠시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갈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내 픽 하고 웃고는 캡슐의 해치를 내린 뒤 눈을 감았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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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Hellic &#8211; Abandoned Planet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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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6 Jan 2012 08:07:39 +0000</pubDate>
		<dc:creator>김 승엽</dc:creator>
				<category><![CDATA[단편소설]]></category>
		<category><![CDATA[소설과 시]]></category>
		<category><![CDATA[Hellic]]></category>
		<category><![CDATA[SF]]></category>
		<category><![CDATA[단편]]></category>
		<category><![CDATA[소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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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연재글 목록 보기 &#187; “제나의 물음에 헬릭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미있나 보군.” “사람 말을 믿지 않으니까 괜한 헛고생 하는 거라고.” 제나가 포기할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헬릭은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번개가 잦아드는 시간에 다시 통신 상태를 확인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 그럼! 사람도 늘었으니 사냥이라도 가볼까!” 제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자, 헬릭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unfusion.kunsan.ac.kr/word/archive/1633#SID1633_1_tgl" title="See post to check out spoiler" class="internal">연재글 목록 보기 &raquo;</a></p>
<p>“제나의 물음에 헬릭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p>
<p>“재미있나 보군.”</p>
<p>“사람 말을 믿지 않으니까 괜한 헛고생 하는 거라고.”</p>
<p>제나가 포기할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헬릭은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번개가 잦아드는 시간에 다시 통신 상태를 확인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p>
<p>“자 그럼! 사람도 늘었으니 사냥이라도 가볼까!”</p>
<p>제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자, 헬릭이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p>
<p>“사냥? 무슨 소리지?”</p>
<p>“무슨 소리긴 말 그대로 사냥이지. 저 비상 식량만 먹고 산 건 아니라고. 가끔은 고기도 먹어야지. 그래! 같이 가는 게 어때?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테니까.”</p>
<p>제나가 먼저 바이크에 올라타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헬릭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바이크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잠시 네비게이터를 확인한 제나가 거칠게 바이크의 가속 페달을 밟았다. 제나의 어깨 너머로 네비게이터의 작동을 바라보던 헬릭이 큰소리로 물었다.</p>
<p>“통신이 되지 않는데 네비게이터는 어떻게 작동하는 거지?”</p>
<p>“정상 작동하는 건 아냐. 내가 지표면에 심어놓은 위치 센서들로 판단하는 거라 범위를 벗어나면 제대로 동작하지 않아.”</p>
<p>이렇게 소리치고는 제나가 한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길이 1미터 정도의 막대 모양의 센서가 세워져 있었다.</p>
<p>이끼들이 깔린 대지를 가로질러, 컨테이너에서 보던 지평선을 향해 한 시간 정도를 달렸을 때 바이크가 멈추고, 제나가 멀리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p>
<p>“저기가 바로 사냥터야!”</p>
<p>제나가 가리킨 방향 멀리, 녹색의 숲이 펼쳐져 있었으나 바이크가 정지 한 곳이 절벽의 끝자락 이어서 목적지까지 가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p>
<p>“우리가 있는 곳이 고원이었군. 그런데 저 아래로 어떻게 내려가지?”</p>
<p>“걱정하지마. 조금만 더 가면 길이 나올 거야. 그 길을 따라가면 금방이지.”</p>
<p>제나가 말을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그녀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저지대로 내려가는 도로가 나타나 그것을 타고 숲으로 갈 수 있었다. 포장되어 있지도 않고, 폭이 일반 도로에 비해 매우 넓은 것으로 보아 전에 보았던 토양 환경 조성용 차량이 이동하기 위해 만든 도로 같았다.</p>
<p>한 시간여를 더 달려 숲에 가까워지자 이끼는 별로 보이지 않고, 키 작은 풀들이 지표를 뒤덮고 있었다. 풀 숲을 지나 숲 입구 쪽에 들어서자 빽빽이 들어찬 나무 때문에 주위가 꽤 어두워졌다. 제나는 바이크를 세우고 옆에 매달려 있던 소총을 꺼내 들었다.</p>
<p>“행성에서 떠나면서 녹지 환경을 조성한 이곳에 동물들을 풀어 놓은 모양이야. 애완동물이나 식량용으로 키웠던 가축들이었을 텐데, 사나워 보이는 놈도 있으니 조심해.”</p>
<p>제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사나워 보이는 놈이란 말에 헬릭은 등에 매고 있던 저격 소총을 앞 쪽으로 돌려 바로 잡고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두운 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나뭇잎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새 소리 때문인지 천둥 소리가 조금은 작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p>
<p>사냥감이 무엇인지 제나에게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가 소총을 들고 풀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p>
<p>“뭘 잡아야 하지?”</p>
<p>헬릭이 묻자 그녀가 조용히 하라는 듯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p>
<p>“나만 빼고 뭐든지. 난 잠시 할 일이 있으니 이따 여기서 다시 보자고.”</p>
<p>잠시 할 일이 있다는 제나의 말에 헬릭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p>
<p>‘소변이라도 보려는 모양이군.’</p>
<p>제나가 지금껏 보여준 성격으로 판단했을 때는 그게 사실이라면,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슴없이 말할 것 같기도 했지만, 여자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제나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헬릭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고, 제나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 길을 잃을 것을 생각해 대검으로 나무에 표시를 하며 숲 깊숙한 곳으로 한참 들어갔을 때, 어디선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멈추어 서서 소리가 난 방향으로 총구를 겨누었을 때, 돼지 한 마리가 앞 쪽 풀숲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제나의 말대로 가축으로 키우던 놈이었던지 야생성이 부족한 듯, 헬릭이 앞에 있음에도 신경도 쓰지 않고 코를 벌름거리며 나무 밑을 파고 있었다.</p>
<p>헬릭이 천천히 소총을 들어 돼지의 머리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돼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돼지의 등 뒤쪽에서 거대한 것이 튀어나와 돼지의 목을 물고는 몸을 뒤집었다. 목을 물린 돼지가 시끄러운 울음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지만 그 거대한 육식 동물의 힘을 이기기에는 부족했다. 거대한 것의 정체는 다름아닌 흰 호랑이였다. 제나의 말대로라면 애완용으로 키우던 알비노 호랑이일 테지만 돼지와는 달리 야생성이 되살아나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유전자 조작으로 공격적인 성향을 없애고 순하게 개량했을 텐데, 먹이를 찾지 못하게 되자 생존 본능이 그것을 이겨낸 모양이었다. 어느새 돼지의 움직임이 둔해졌고, 배를 가르고 그 안에 주둥이를 들이밀어 입 주변이 벌겋게 된 놈이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헬릭을 바라보고 있었다.</p>
<p>“돼지를 놓쳤으니 네 놈이라도 잡아야 할까?”</p>
<p>헬릭이 중얼거리며 호랑이의 미간을 겨눴다. 그러자 이내 호랑이가 천천히 헬릭 쪽으로 다가왔다. 행동이 느린 게 공격하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뒤에서 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p>
<p>“쏘지마! 저 놈도 외로워서 그런 거니까.”</p>
<p>그 말과 함께 호랑이가 안기듯 덮쳤고,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헬릭이 뒤로 넘어졌다. 헬릭이 넘어지자 놈이 헬릭의 뺨과 입 주변을 핥아 주둥이의 돼지 피가 얼굴에 잔뜩 묻었다. 이윽고 제나가 다가와 거친 혀로 헬릭의 뺨을 핥던 호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고, 그 틈에 헬릭이 빠져 나왔다.</p>
<p>“인사해. 이 놈도 우리같이 사냥꾼이니까.”</p>
<p>“아까 말한 사나워 보이는 놈이란 게 이 놈인가?”</p>
<p>“그래, 맞아.”</p>
<p>애완용이었던 습성이 남아있는지 제나 앞에서 고양이처럼 얌전한 호랑이를 지켜보던 헬릭이 물었다.</p>
<p>“네가 키우던 건 아닐 테고, 돼지를 잡아먹는 걸 보면 야생성이 되살아난 것 같던데.”</p>
<p>“여기를 발견하고 처음 돼지를 사냥했을 때 만났는데, 삐쩍 말라 있길래 돼지 내장을 먹이면서 가르쳤지. 야생성이 살아난 건 아냐.”</p>
<p>제나의 말에 헬릭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p>
<p>“오늘은 따로 사냥할 필요 없겠는데, 야옹이가 잡은 걸 조금 떼어가면 될 것 같아.”</p>
<p>호랑이를 야옹이라고 부르는 것에 헬릭이 피식하고 웃는 사이, 제나가 돼지 쪽으로 다가가 칼로 앞다리와 뒷다리를 떼어내 한 쌍씩 끈으로 묶은 뒤 하나를 헬릭에게 던졌다.</p>
<p>“저 녀석 먹는 양이 많지 않으니, 이 정도 가져가도 상관없을 거야.”</p>
<p>그리고는, 남은 다리 한 쌍을 어깨에 매고 일어나 호랑이를 쓰다듬더니 말했다.</p>
<p>“너도 쓰다듬어줘. 나중에 만났을 때는 네 말대로 야생성이 되살아나 공격할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저 놈도 많이 외로웠을 테니.”</p>
<p>제나의 말에 헬릭이 호랑이의 이마를 긁어주자 금세 배를 보이며 드러누웠다.</p>
<p>“데려가서 키울 생각은 안 했나 보군.”</p>
<p>제나가 호랑이에게 꽤 애정을 보이는 것 같아 헬릭이 호랑이의 배를 긁으며 슬쩍 떠보았다.</p>
<p>“생각은 했지만 여기가 더 나아.”</p>
<p>제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호랑이의 등을 살짝 때려 돌려보내자, 녀석은 제나를 잠시 물끄러미 지켜보더니 돼지를 물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p>
<p>“그럼 돌아갈까?”</p>
<p>호랑이가 사라진 방향을 지켜보던 제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앞장섰다. 숲의 지리를 다 꿰고 있는지 바이크를 세워둔 곳까지 오는데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방향을 확인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바이크에 올라타려던 헬릭은 포도와 마른 나뭇가지 따위의 땔감이 가방 안에 잔뜩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제나에게 물었다.</p>
<p>“숲에 이런 것도 있나?”</p>
<p>“아까 가서 따온 건데, 저 쪽에 가면 꽤 많아. 어서 타!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하니까.”</p>
<p>‘이걸 따러 갔던 건가? 아니지, 그런 거라면 굳이 혼자 갈 필요가 없었겠지?’</p>
<p>헬릭이 이런 생각을 하며 피가 떨어지는 돼지 다리를 바이크 뒤에 묶고, 뒷좌석에 앉자마자 제나가 바이크를 거칠게 출발시켰다. 제나가 서둘렀는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알 수 없었으나 돌아오는 데는 한 시간 반이 채 걸리지 않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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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불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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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3 Jan 2012 04:54:03 +0000</pubDate>
		<dc:creator>김 승엽</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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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소설과 시]]></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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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불안]]></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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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최근에 SF 단편들을 연재하고 있는 조아라 라는 사이트에서 한 독자로부터 추천과 댓글을 꽤 많이 받았다. 덕분에 몇 년 동안 겨우 십여 편, 제자리 걸음뿐인 비인기 작이 잠시 동안이지만 메인 페이지 상단에 올라가는 호사도 누리게 됐다. 누군가 읽고 반응을 주었다는 사실이 기뻐서, 옴니버스라고 잘못 적었던 작품소개도 픽스 업 형식이라 고쳐 쓰고 묵혀 놓았던 새 에피소드도 올리게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최근에 SF 단편들을 연재하고 있는 조아라 라는 사이트에서 한 독자로부터 추천과 댓글을 꽤 많이 받았다. 덕분에 몇 년 동안 겨우 십여 편, 제자리 걸음뿐인 비인기 작이 잠시 동안이지만 메인 페이지 상단에 올라가는 호사도 누리게 됐다. 누군가 읽고 반응을 주었다는 사실이 기뻐서, 옴니버스라고 잘못 적었던 작품소개도 픽스 업 형식이라 고쳐 쓰고 묵혀 놓았던 새 에피소드도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일이 기쁘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 </p>
<p>적극적이지도 못했고, 확신도 없었기에 길게 보자고 다짐했었다. 누군가 좋아해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기만족 만으로도 상관없다고 자위하던 참이었다. 불행한 일이지만 짝사랑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타협하여 익숙해지던 중이었다. 내 템포에 맞춰서,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으며 쓰던 것이, 저 작은 사건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 </p>
<p>잔잔한 연못에 일어난 작은 파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내 잔잔해 질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옥죄고, 그게 오히려 글을 쓰지 못하게 한다. 괜한 욕심에 써야 할 글 대신 짤막한 구상들만 늘어놓고, 이러다 결국엔 쫓기듯 마무리 짓고 후회하게 될 것이 뻔하다. 천천히, 차근차근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쓰겠다고 했는데 작은 파장에 욕심을 부리고 있다.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떨쳐내야 할 욕심인데 힘들다. 참 힘든 일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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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Hellic &#8211; Abandoned Planet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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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30 Dec 2011 04:08:20 +0000</pubDate>
		<dc:creator>김 승엽</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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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연재글 목록 보기 &#187; Hellic Esmond – Abandoned Planet 행성의 중력권 안으로 들어선 개인용 비상탈출 캡슐이 대기권 진입을 위해서 가스를 분사하여 위치를 조정했다. 간헐적인 가스 분출과 회전으로 움직임이 안정된 캡슐이 천천히 행성을 향해 끌려가는 듯하더니 점차 속도가 증가했다. 이 캡슐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은 바로 헬릭이었다. 세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셀돔으로 가던 그가 “여왕의 아이들”이라는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unfusion.kunsan.ac.kr/word/archive/1625#SID1625_1_tgl" title="See post to check out spoiler" class="internal">연재글 목록 보기 &raquo;</a></p>
<p><strong>Hellic Esmond – Abandoned Planet</strong></p>
<p>행성의 중력권 안으로 들어선 개인용 비상탈출 캡슐이 대기권 진입을 위해서 가스를 분사하여 위치를 조정했다. 간헐적인 가스 분출과 회전으로 움직임이 안정된 캡슐이 천천히 행성을 향해 끌려가는 듯하더니 점차 속도가 증가했다. 이 캡슐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은 바로 헬릭이었다. 세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셀돔으로 가던 그가 “여왕의 아이들”이라는 테러범들에게 잡혔다가 이 비상탈출 캡슐에 타고 우주를 떠돌게 된 것은 정말 불운과 불운의 연속이라 할만했다. 사실 안에 잠들어 있는 헬릭은 모르고 있지만 이 비상탈출 캡슐은 탈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을 지나가던 화물선에 의해 인양되었었다. 개인용 비상탈출 캡슐은 기본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곳을 지나는 우주선의 구조를 받을 수 있도록 언제나 구조신호를 발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신호를 수신한 화물선이 캡슐을 발견하게 된 것인데, 구조가 아닌 인양이 된 이유는 캡슐을 끌어올린 화물선의 탑승자들이 반사회적인, 간단히 말해 도망 중인 범죄자들이어서 이 비상탈출 캡슐을 열어 헬릭을 구조하지 않고 그대로 화물칸에 집어넣고는 인간의 육체를 원하는 그들의 거래처에 팔아버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화물선에 실린 채 어딘가에 팔렸더라면, 과정은 어찌 되었든 헬릭이 좀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 또 다른 불운이 찾아왔다. 이 화물선이 범죄자들을 추격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의 공격을 받아 화물칸 해치가 열리면서 인양되었던 위치에서 한참 떨어진 엉뚱한 곳에서 비상탈출 캡슐이 다시 표류를 시작한 것이었다. 정상적인 항로를 벗어난 곳에서 떠돌고 떠돌아 가까스로 유인행성의 신호를 발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p>
<p>낙하 속도가 증가하던 캡슐에서 낙하산이 펴지면서 속도가 줄어들더니 가스를 분출하여 낙하 위치를 조정했다. 협곡과 바위뿐인 지상에 캡슐이 내려앉은 뒤 잠들어 있는 탑승자를 깨우는 작업과 대기상태 및 중력을 재확인 하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작업들이 완료되고 헬릭이 정신을 차릴 즈음해서 캡슐의 해치가 열렸다. 오랜 수면으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깨어난 헬릭은 눈이 부셔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p>
<p>두 개의 태양, 적갈색의 토양, 대기 상태가 인간이 살기에 적당한 것으로 보아서는 식민지 이주를 위해 개발된 개척행성인 것 같았다. 하늘은 온통 구름으로 가득했는데 직사광선과 자외선을 막기 위해 일부러 대기권에 인공적인 구름층을 형성 시킨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지상은 태양이 구름에 가려 조금 어두운 상태였는데 구름의 상태가 조금 달라 보였다. 구름 층 사이에서 강력한 전하 이동이 일어나는지 마른 번개가 매우 빈번히 구름 층 사이에 퍼지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고도에서 일어나는지 천둥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헬릭은 일어서서 캡슐에서 걸어 나오려다가 현기증과 약해진 다리 근육 때문에 잠시 비틀거렸다. 겨우 몸을 가다듬고 캡슐에 걸터앉아, 자신이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알기 위해 캡슐 안의 시간을 확인한 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캡슐의 동작시간은 2년 8개월 27일 14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통신장치를 확인해 보았지만 확인되는 전파도 없었기 때문에 별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p>
<p>개척행성이라면 분명 위성에서 캡슐의 착륙을 확인하고 구조대를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대로 캡슐이 있는 위치에서 기다려보기로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만약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첫 번째 태양에 이어 두 번째 태양이 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헬릭은 비상 식량을 꺼내 배를 채우고 캡슐 안에 몸을 뉘었다. 일단 내일까지는 기다려보자고 마음 먹었지만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다.</p>
<p>7시간이 지나 첫 번째 태양이 떠오르자 헬릭은 일어나 통신장치를 다시 확인해 검색되는 채널이 없는 것을 보고는, 결국 자신의 무기 케이스와 구난 구호 세트를 꺼내 놓았다. 그리고 캡슐 안의 컴퓨터를 조작하여 자신이 착륙한 행성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번개 때문에 간혹 화면에 노이즈가 생기긴 했지만 동작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화면에 나타난 행성 번호가 GSP-0310으로 나오는 것을 보아 GPC 에서 개발하는 행성이었다. 자신의 PDA 에 캡슐의 DB에 있는 정보들을 다운로드 한 뒤 지도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무인 설비의 위치를 확인했다. 개인용 비상탈출 캡슐이 착륙 위치를 계산할 때, 지도에 나와 있는 요소들을 포함시켰기 때문에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도에서 확인한 무인설비까지의 직선 거리는 20Km 정도였지만, 도보로 이동했을 시의 거리는 35Km 이상으로 나오고 있었다. 혹시 나중에 도착할지 모를 구조대에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칼을 꺼내 캡슐의 겉면에 자신이 가려고 하는 무인설비의 좌표로 이동한다는 내용을 새겨 놓고 나서, 장비와 구난 구호 세트를 등에 짊어진 뒤, 발걸음을 옮겼다. 착륙한 지 10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p>
<p>온통 적갈색뿐이었던 지상에 푸른색의 이끼류 생물이 나타나자 헬릭이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협곡을 우회하여 언덕을 따라 내려와 대평원에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시 앉아 푸른색으로 펼쳐진 대지를 바라보며 쉬고 있던 헬릭의 시선이 순간 한 곳을 향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서 자신의 무기 케이스에서 BLINK 430 (저격 라이플)과 헤드 기어를 꺼냈다. HUD에 녹색의 높이 솟은 구조물의 모습이 나타나자 더 가까이 가서 확인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외부 형태가 직선인 것으로 보아 인공적인 시설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했지만, 온통 녹색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거대한 바위를 잘 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헬릭이 멈추어 섰다. 그것은 개척행성의 토양환경 조성을 위해 바위를 분쇄하고, 땅을 일구는 거대한 토양 환경 조성용 차량이었다. 전장 100m에 높이도 족히 50미터는 넘을 거대한 차량이 외부가 온통 이끼에 뒤덮여 그 곳에 멈춰서 있었다. 어째서 이런 차량이 버려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개발 중인 행성이라면 분명 저 차량은 중앙 시스템의 통제를 받아 움직이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온통 이끼에 뒤덮여 있는 모습이 불안했다. 차량에 도착한 헬릭은 거대한 캐터필러 옆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조종석을 확인했다.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는지 차창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백골이 된 조종사의 머리가 시커멓게 탄 시트 위에 놓여있었다. 혹 차량이 움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종석을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먼지 쌓인 조종석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어서 아무런 작동도 하지 않았다. 조종석에서 지상으로 다시 내려온 헬릭은 차량이 만든 그늘 밑에 앉아 비상 식량을 꺼냈다. 딱딱한 건조식량을 씹으며 헬릭은 버려진 차량과 공격받은 흔적,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구조대등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불안은 숨길 수 없었다. 제발 지도에서 확인했던 무인설비가 동작하고 있어서 외부와 연락이 가능하기를 바랄 뿐이었다.</p>
<p>헬릭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무인설비 쪽으로 향했다. 무기 케이스와 구난 구호 세트까지 짊어지고 걷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점차 걸음이 느려지고 다리 근육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구난 구호 세트에 들어있는 식량과 물의 양은 아끼고 아껴 일주일 정도 버틸 수 있는 양이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구조 신호를 보내야 했다. 만약 이 곳이 버려진 행성이라면 구조대가 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예측할 수 없었다.</p>
<p>걷는 동안 다른 생물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지표를 덮고 있는 이끼 외에 생물을 발견되지 않았다. 아마도 물이 있는 곳에 대기조성을 위한 식물군이 조성되어 있을 테지만, PDA에 다운로드 한 행성 정보에는 그런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없을 경우에는 차선책으로 그 식물군이 있는 곳을 찾아야 했지만, 설사 위치를 안다고 할 지라도 그 곳까지 걸어서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p>
<p>해가 져서 어두워지자, 바위를 찾아 기대어 앉았다. 지난 밤은 캡슐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체감하지 못했지만, 밤낮의 기온 차가 상당히 심했다. 마음 같아서는 불이라도 피우고 싶었지만 이끼뿐인 평원에서 적당한 땔감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무기 케이스 안에서 길리슈트를 꺼내 덮고, 그 위에 걷어낸 이끼를 다시 덮는 것으로 추위를 막아보았지만, 한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구름 사이의 번개는 밤이 되자 조금 잦아들긴 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샌 헬릭은 첫 번째 태양이 뜨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인설비까지의 거리는 어느새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p>
<p>두 번째 태양이 머리 위에 와 있을 즈음해서 헬릭은 PDA를 확인했다. 이 정도 거리까지 가까워졌다면 이제 보여야 할 텐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PDA와 주변을 번갈아 살펴보던 헬릭이 순간 저 멀리서 뭔가를 발견하고는 목에 걸고 있던 라이플을 집어 들어 스코프로 확인했다.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을 확인한 헬릭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그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p>
<p>그것은 헬릭이 기대하던 무인 설비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송수신 장비를 탑재한 작은 철탑이거나 안테나를 달고 있는 작은 건물 같은 것을 예상했었는데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건물이라기 보단 담이나 울타리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직사각형의 금속, 일종의 화물용 컨테이너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이 20m, 높이 4m, 너비 6미터의 커다란 금속 외벽에 사람이 드나들기 위한 출입구 같은 것이 몇 개 달려 있어서 화물용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어쩌면 새로운 형태의 무인 설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헬릭이 출입구 쪽으로 다가가 개폐 버튼을 눌렀다. 잠시 기다렸다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한 헬릭이 수동 조작용 레버를 돌려 옆으로 당기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금속 문이 열렸다.</p>
<p>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자 실내의 조명이 자동으로 켜졌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비상 식량들과 바닥에 뒹굴고 있는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밖에서 보았을 때 보다 천장이 낮은 것이 이층이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쪽에 문 같은 것이 있어서 그 곳을 통해 올라가도록 되어 있을 것 같았으나, 손잡이나 버튼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의자를 끌어다 그 밑에 놓고 올라가 두드려 보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무기 케이스와 구난 구호 세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라이플만 목에 건 채 의자에 주저 앉았다. 아직 자신이 원하던 통신 장비는 찾지 못했지만 한 쪽 벽에 놓인 비상 식량들을 보자 안도감에 피로가 몰려왔다. 더구나 지난 밤,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몰려오는 피로감에 헬릭은 그대로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일단은 잠시 자고 일어난 뒤에 위층에 올라가 살펴볼 생각이었다. 실내의 조명은 작동하는데 문은 녹슬어 열리지 않았던 것이나, 안쪽에 비상 식량이 쌓여있는 이유, 그리고 무엇보다 방치되어 있는데도 꽤 깨끗한 상태라는 사실 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밤새 추위 속에 떨었던 피로감과 이 곳이 버려진 행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무의식적인 확신이 그런 중요한 요소에 대한 판단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p>
<p>헬릭이 이상한 기척을 느낀 것은 잠든 지 세시간 정도 지난 뒤였다. 방 안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며, 라이플을 겨누며 일어섰다. 놀라서 허둥대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p>
<p>“쏘기라도 할거야?”</p>
<p>라이플을 겨눈 헬릭 앞에 서있는 것은 여자였다. 문 옆에 기대어 서서 라이플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헬릭을 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여자가 말했다. 뒤로 묶은 갈색 머리와 팔짱을 끼고 있는 오른손에 들린 권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볕에 그을린 연갈색의 피부에 이십대 후반이나,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노려보며 헬릭이 말했다.<br />
<span id="more-1625"></span><br />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행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군. 개인용 비상 탈출 캡슐을 타고 그제 이 행성에 떨어졌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대가 오지 않아서 불안해 하던 참이야.”</p>
<p>헬릭의 말에 여자가 권총을 쥔 손으로 라이플 총구를 치우라는 손짓을 하더니 자신의 권총을 홀더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p>
<p>“밖에 있는 저거 말이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갔었는데 도착했을 때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어딘가 헤매고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여기 와 있었군.”</p>
<p>밖에는 헬릭이 타고 왔던 개인용 비상탈출 캡슐이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차량 뒤에 매달려 있었다. 라이플 총구를 돌려 등에 맨 헬릭은 다시 의자에 앉아 물었다.</p>
<p>“GPC에서 관리하는 행성인 것 같은데, 개발이 중단된 건가? 오다가 부서진 토양 개발 차량 같은 걸 봤는데……”</p>
<p>헬릭의 물음에 여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p>
<p>“여기 버려진 행성이 맞아. 개발도 중단됐고, 그러니까 당신은 말하자면 이곳에 생존하고 있는 두 번째 조난자야. 물론 첫 번째는 나고”</p>
<p>말을 마치고 여자는 큭큭거리며 웃더니 악수라도 하자는듯 손을 내밀었다. 헬릭은 여자의 내민 손을 본체만체 하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p>
<p>“이 행성에서 나갈 방법이 없다는 건가? 외부로 연락할 방법 같은 것도 없고?”</p>
<p>“아! 빠져나갈 방법 말이지. 있을까? 없을까? 궁금하지?”</p>
<p>헬릭은 계속 웃음을 머금고 있는 여자의 말투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은 여자의 행동에 약간 화가 났지만 이 여자라도 만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내색하지 않았다. 헬릭이 아무 말도 없자, 여자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p>
<p>“그런 방법이 없었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이 행성에 처박혀있었지.”</p>
<p>여자의 말투가 이내 체념한 듯 바뀌었다.</p>
<p>“그럼 당신은 얼마 동안이나 이 행성에 있었던 거지?”</p>
<p>헬릭이 이렇게 묻자 여자가 눈을 위로 뜨며 한참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p>
<p>“아마 한 5년에서 6년 정도 됐을 거야.”</p>
<p>여자의 대답에 헬릭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자가 헬릭에게 다가와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p>
<p>“식량도 있고, 식수도 있으니까 그리 나쁜 상황은 아냐. 거기다 나 같은 미녀와 단 둘이 이 행성에 있으니 당신 꽤 행운아라고!”</p>
<p>여자가 이렇게 말하고는 이내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큭큭거렸다. 헬릭은 여자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p>
<p>여자는 헬릭의 뒤로 가서 아까 천정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여자가 그곳에 서서 주머니에서 꺼낸 PDA를 조작하자 천정이 열리며 계단이 내려왔다. 여자는 헬릭을 내버려두고 계단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p>
<p>“거기 계속 앉아 있을 거야?”</p>
<p>여자의 말에 헬릭이 일어서서 여자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위는 아래층과는 달리 깔끔하고 밝았다. 입구 안 쪽 깊은 곳에는 침대가 놓여있었고, 입구 근처에는 전자 장비들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헬릭의 위에서 내려와 있는 올가미가 눈에 띄었다. 자살을 위해서 매달아 놨다 하고 생각하는데 여자가 헬릭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말했다.</p>
<p>“혹시라도 내가 저 끈도 매달지 못할 정도로 아프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그 때를 대비해서 매달아 놨지.”</p>
<p>헬릭은 여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중 하더니 입구 근처의 전자장비들을 만지작거렸다. 혹 외부와의 통신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는데, 일반적인 개인용 컴퓨터와 수리용 장비 같은 것들뿐이었다.</p>
<p>“당신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이 컨테이너는 뭐고?”</p>
<p>헬릭이 전자장비를 만지던 것을 멈추고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p>
<p>“내가 타고 있던 우주선이 이 행성 근처에서 공격을 받아서 나도 너랑 비슷하게 탈출장치와 함께 이 행성에 떨어진 거야. 컨테이너는 원래부터 여기 있었고.”</p>
<p>“무인 설비로 나와있던데 아래층에 쌓여있는 저 비상식량들은 뭐지, 그리고 안에 있는 장비들을 봐도 사람이 쓰기 위한 것 같은데.”</p>
<p>“그렇게 나한테 물어봐도 소용없어. 행성 정보를 업데이트 하지 않은 모양이지. 내가 도착해서 이 주변에 가까운 기지나 설비들을 찾아가 봤지만, 지리정보가 거의 맞지 않더라고”</p>
<p>여자의 말에 헬릭이 입술을 깨물었다. 감옥에 갇힌 것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었다. 유배, 헬릭의 머릿속에 그 단어 만이 떠올랐다.</p>
<p>“다른 곳에 있는 통신 장비들은 어때? 모두 다 고장인가?”</p>
<p>“대충 어떤 심정인지 이해는 가지만 그렇게 급하게 이것 저것 캐묻지마. 네가 타고 온 캡슐을 끌고 오느라고 나도 꽤 피곤하니까. 낮잠이나 한 숨 잘 테니까 그 뒤에 이야기하자고. 아! 당신도 좀 더 자지 그래? 아까 의자에서 졸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피곤한 모양이던데. 내 침대에서 같이 자도 되고, 좁아서 싫으면 아래층의 캡슐에서 자던지.”</p>
<p>여자의 말에 헬릭이 다시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계단을 내려와 밖에 놓여진 캡슐을 한 번 바라보고는 아까 자신이 앉았던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 앉아 무릎 위에 라이플을 올려 놓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행성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반대로 그게 단 한 명, 그것도 뭔가 묘한 반응을 하는 여자라는 점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감보다 더 큰 절망감이 그를 흔들었다. 헬릭은 그 절망감이라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일어나 캡슐로 들어갔다. 여자의 말대로 잠이라도 자두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p>
<p>헬릭이 다시 일어난 것은 캡슐에서 들리는 묘한 마찰음 때문 이었다. 마치 송곳 같은 뾰족한 것으로 캡슐의 외부를 긁어대는 듯한 소리에 눈을 떠 일어났을 때, 약 1미터 크기의 로봇이 보였다. 바퀴 달린 4개의 다리와 4개의 팔을 달고 있는 로봇이 캡슐에 달라붙어 뭔가를 떼어내는 것을 지켜보던 헬릭은 몸을 일으켜 로봇을 향해 말했다.</p>
<p>“뭘 하고 있는 거지?”</p>
<p>“쓰레기에서 쓰레기를 분리해 내는 거야.”</p>
<p>“뭐라고?”</p>
<p>로봇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다시 질문을 했지만 로봇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p>
<p>“뭐하고 있는 거야!”</p>
<p>“작업 중이니까 방해하지마.”</p>
<p>어딘가 고장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로봇의 움직임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로봇이 캡슐에서 뭔가를 꺼내서 트레이너 안으로 사라지자 헬릭은 일어나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트레이너 안에서는 여자가 테이블 위에 로봇이 가져온 물건을 받아서 올려놓고 있었다.</p>
<p>“뭘 꺼냈지?”</p>
<p>“일단은 배터리, 저 작업 로봇하고 바이크 배터리에 좀 문제가 있어서 교체해야 하거든.”</p>
<p>여자의 말에 헬릭이 로봇을 바라보았다. 로봇은 배터리를 여자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캡슐로 향하고 있었다.</p>
<p>“다른 곳에도 가본 건가?”</p>
<p>“다른 곳?”</p>
<p>헬릭의 물음에 여자가 배터리를 만지 작 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헬릭을 바라보았다. </p>
<p>“통신 장치가 있는 곳.”</p>
<p>“아! 어제 물어봤던 것 말이군.”</p>
<p>“그래, 어디에 가본거지?”</p>
<p>“바이크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곳은 이 대륙에는 두 군데 밖에 없어, 모두 파괴되어 있고 게다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통신 장비가 없어서 우리가 외부와 연락을 하지 못하는 게 아냐.”</p>
<p>“그건 무슨 소리지?”</p>
<p>헬릭의 물음에 여자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p>
<p>“저 구름층 때문이야. 그곳에서 일어나는 극렬한 전하이동 때문에 통신을 할 수가 없는 거라고.”</p>
<p>“지금 번개 때문에 통신 불능 상태라고 말하는 거야?”</p>
<p>“응. 맞아.”</p>
<p>여자의 말에 헬릭이 컨테이너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번개가 번쩍거리고 있었다.</p>
<p>“항상 저렇게 구름이 끼어 있지는 않을 것 아냐?”</p>
<p>“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내가 있는 동안에는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어.”</p>
<p>헬릭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여자가 이마를 긁으며 말했다.</p>
<p>“자세한 것까진 모르지만 아마 두 개의 태양 때문에 일부러 구름층을 만들었겠지.”</p>
<p>구름층의 용도에 대한 것은 헬릭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구름층에서 발생하는 번개가 통신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p>
<p>“저런 지속적인 번개에 대한 시뮬레이션도 하지 않고?”</p>
<p>“자세한 건 모른다고 했잖아. 나도 짐작일 뿐이라고.”</p>
<p>“아무리 번개로 인해서 노이즈가 심하다고 하더라도 통신이 불가능 하다는 건 말이 안돼!”</p>
<p>헬릭이 언성을 높이자 여자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p>
<p>“어쨌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신 장비로는 안되니까. 그나저나 뭐라고 부르면 될까? 조난자? 불운한 행운아?”</p>
<p>이런 상황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여자가 꼴 보기 싫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p>
<p>“헬릭.”</p>
<p>“헬릭이라. 난 제나라고 불러줘. 그리고 저기 저 로봇은 레베카라고 부르지만 뭐 내키는 대로 불러도 상관없을 거야.”</p>
<p>자신을 제나라고 밝힌 여자는 탁자 위의 비상식량 상자를 헬릭에게 던지고는 의자에 앉자 다른 상자 하나를 열었다.</p>
<p>“일단 배나 채워둬. 신경 쓰고 있는 통신 장비들은 다 먹고 나서 보여줄 테니까.”</p>
<p>제나는 상자를 뜯어 안에 들어있는 네모란 합성 음식물을 우걱우걱 씹기 시작했고 헬릭도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상자를 열었다.</p>
<p>식사를 마치고 제나가 컨테이너 안쪽에서 통신 장치를 들고 나타나 헬릭 앞에 내려놓았다.</p>
<p>“아마 태양광 패널을 좀 펼쳐놓고 충전을 해야 할 거야. 마음껏 테스트 해봐.”</p>
<p>제나가 사라지자, 헬릭은 통신 장치를 들고 밖으로 나와 옆에 달린 태양광 패널을 펼쳤다. 그리곤 장비를 살펴 전원 스위치를 켜고 통신 가능한 주파수를 검색했다. 기기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았으나 제나의 말대로 한 참이 지나도 정상 연결되는 주파수는 찾을 수 없었다. 헬릭이 통신 장치의 검색 패널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이 레베카라고 부른다던 로봇이 통신 장치 쪽으로 다가왔다.</p>
<p>“비상식량 상자랑 포장지 내놔.”</p>
<p>“뭐라고?”</p>
<p>“상자와 포장지. 어디다 버렸어?”</p>
<p>“컨테이너 안에 있을 텐데.”</p>
<p>“처음이니까 용서해주지. 다음에는 나한테 줘!”</p>
<p>“알았어. 그런데 넌 다른 로봇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p>
<p>헬릭이 이 당돌한 로봇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물었다. 헬릭의 물음에 레베카라는 로봇이 말했다.</p>
<p>“언어 패턴이 소유자의 성향에 따라 변화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어서겠지. 로봇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인간들이 이렇게 만든 거지. 그러니까 맘에 안 들거든 네 종족을 탓해. 나도 이 거지 같은 하드웨어로 옮겨 오고 와서는 적응하기 힘드니까.”</p>
<p>레베카의 말에 헬릭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p>
<p>“하하 그래 알았어. 그런데 원래는 이런 형태가 아니었나 보군?”</p>
<p>“뭐가 그렇게 알고 싶은 게 많은 거야? 나중에 로그 데이터 넘겨줄 테니 그거나 살펴봐.”</p>
<p>“그래 그렇게 하지. 레베카”</p>
<p>“레베카? 그건 뭐야 날 부르는 호칭인가?”</p>
<p>“그래, 제나라는 여자가 그렇게 알려주던데.”</p>
<p>헬릭의 말에 잠시 로봇이 정지한 듯 아무런 움직임이 없더니 이내 음성장치를 통해 말했다.</p>
<p>“레베카라고? 맘대로 해.”</p>
<p>로봇은 바퀴를 굴려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고 헬릭은 다시 통신 장치로 눈을 돌렸다. 계속 검색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주파수는 찾지 못한 것 같았다. 헬릭은 통신 장치를 들고 일어나 컨테이너 옆에 세워 놓고는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순간 놀라 등에 둘러 매고 있던 Blink 430(저격소총)을 쳐들었다.</p>
<p>“누구 맘대로 내 물건을 만지는 거지?”</p>
<p>컨테이너 안의 어둠 속에서 손에 Storm-13 (돌격소총)을 들고 있는 제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p>
<p>“저 커다란 가방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열어봤더니 이런 게 들어있길래.”</p>
<p>“이리 줘!”</p>
<p>헬릭은 총구를 내리며 다가가 제나의 손에 들린 소총을 빼앗아 상태를 확인했다. </p>
<p>“저렇게 커다란 상자에 별로 쓸데 없는 물건들만 잔뜩 가지고 다니는군.”</p>
<p>헬릭은 소총의 안전장치를 확인하고는 다시 무기 케이스에 집어넣었다.</p>
<p>“네 등에 메고 있는 것도 집어넣는 게 어때? 그렇게 매고 다니면 무겁지 않아?”</p>
<p>옆에 서서 헬릭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제나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헬릭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무기 케이스를 잠그고 일어났다.</p>
<p>“말 상대도 해주고, 먹을 것도 주고, 잠도 재워줬는데 뭐 그렇게 날카롭게 구는거야!”</p>
<p>헬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나가 소리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헬릭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의자를 들고 밖으로 나와 통신 장치 앞에 가져다 앉았다. 낮게 울리는 천둥소리와 바람소리만 두 사람 간의 침묵을 메웠다. </p>
<p>헬릭이 주파수가 잡히지 않는 통신 장치를 들여다보는 것에 질려갈 즈음, 컨테이너 안에서 제나가 나와 말했다.</p>
<p>“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진 건 사과할게.”</p>
<p>제나가 사과했지만, 헬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p>
<p>“그 통신 장치는 레베카한테 들여다보라고 하고, 나랑 얘기나 하자고.”</p>
<p>제나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하자 헬릭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p>
<p>“지금은 별로 그럴 기분이 아냐. 그렇다고 너한테 화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때문에 날카로워져서 그런 거니까 잠시 가만 놔뒀으면 좋겠군.” </p>
<p>헬릭의 말에 제나가 낮게 으음 하고 소리를 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통신 장치를 보면서 헬릭은 어떻게 이 행성을 탈출할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별 달리 뾰족한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안 쪽에서 레베카가 나오더니 컨테이너 뒤 쪽으로 사라졌다가 시체처럼 축 늘어진 마네킹 같은 것을 질질 바닥에 끌면서 나타났다.</p>
<p>“그건 뭐지?”</p>
<p>“원래 내 하드웨어. 부품들이 생겼으니 고쳐보려는 거야.”</p>
<p>“부품이라는 건 내가 타고 온 탈출 장치를 말하는 건가?”</p>
<p>“그래.”</p>
<p>레베카는 이렇게 말하고는 여성형 안드로이드 몸체를 끌고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헬릭의 비상 탈출 장치에서 전자 부품들을 잔뜩 꺼내 안으로 들어가다가 말했다.</p>
<p>“안에 있는 여자는 믿을 수 없어. 네가 도와줘!”</p>
<p>“뭘 도와달라는 거지?”</p>
<p>막 통신 장치의 태양광 패널을 접고 있던 헬릭이 레베카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p>
<p>“내 원래 하드웨어의 수리는 대충 마쳤는데, 내 기억 모듈을 옮기려면 잠시 전원을 끈 뒤에, 누군가가 직접 옮겨줘야 해.”</p>
<p>“나보고 옮겨달라는 거군.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나보다 제나를 더 신뢰할 수 없다는 건가?”</p>
<p>헬릭의 물음에 레베카가 작동을 멈춘 듯 조용해지더니 이내 말했다.</p>
<p>“신뢰라는 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나 필요한 거야. 그녀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네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야.”</p>
<p>“그래. 어떻게 도와주면 돼지?”</p>
<p>헬릭의 물음에 레베카가 대답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제나는 보이지 않았고 테이블에는 레베카가 꺼내온 안드로이드가 엎드린 채 누워있었다. 머리 뒤에서 목을 지나 등까지의 인조 피부와 내부 골격이 벗겨져 있어 내부가 훤히 보였다. 레베카는 기계 손으로 머리 부분의 금속 골격을 제거하고 등 안 쪽의 단자에 케이블을 연결한 뒤,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헬릭에게 말했다.</p>
<p>“이전 작업이 시작되면, 음성으로 작업 과정에 대한 설명이 나올 테니 그에 따라 진행하면 될 거야.”</p>
<p>“알았어.”</p>
<p>헬릭이 대답하자 그와 동시에 레베카가 정지한 듯 이전까지 작동을 확인 할 수 있던 불빛들이 모두 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레베카의 몸체 뒤가 열리면서 정육면체로 된 여섯 개의 전자 두뇌가 밖으로 노출됐다.</p>
<p>- 데이터 이전 작업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두뇌 패널의 두뇌 큐브들을 이전하고자 하는 하드웨어로 옮겨주십시오.</p>
<p>레베카의 음성 출력장치에서 흘러나오는 설명대로 헬릭이 패널을 꺼내자 이번에는 안드로이드 쪽에서 설명이 흘러나왔다.</p>
<p>- 두뇌 패널에서 큐브를 제거하여 머리 뒤의 입력 슬롯에 삽입해 주십시오. 큐브는 자동으로 정렬되니 순서에 상관없이 삽입해 주십시오.</p>
<p>헬릭은 명령대로 슬롯에서 두뇌 큐브를 떼어내 안드로이드로 삽입했다. 작업이 끝나자 외부골격이 자동으로 닫히면서, 안드로이드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p>
<p>- 기본 테스트가 완료 되었습니다. 기동을 시작합니다.</p>
<p>안드로이드, 아니 이제 새로운 레베카가 테이블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p>
<p>“덕분에 제대로 작업이 끝난 것 같군.”</p>
<p>레베카는 팔을 뒤로 꺾어 벗겨진 인공 피부를 접합하고는 테이블에서 내려와 멈추어 있는 로봇의 부품들을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p>
<p>“아직 70 퍼센트 정도 밖에 복구하지 못했지만, 이 로봇의 부품들을 이용하면 85 퍼센트까지 복구가 가능할 거야.”</p>
<p>“그 전에 뭔가 걸쳐야 할 것 같은데. 전에 입고 있던 옷은 어디 있지?”</p>
<p>헬릭이 이렇게 말하자 레베카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말했다.</p>
<p>“예전 옷은 제나가 입고 있어. 그런데 뭘 입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p>
<p>마침 헬릭이 컨테이너 한 쪽에서 낡은 정비복을 찾아 레베카에게 건넸다. 옷을 받아 든 레베카가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놓고는 말했다.</p>
<p>“안드로이드의 알몸을 보고 부끄러워하나? 수리가 끝나면 입지. 그래도 도움을 받았으니까.”</p>
<p>“고맙군.”</p>
<p>헬릭이 이렇게 말하고 의자에 앉아 레베카가 자신의 몸을 수리하는 것을 지켜보는 사이, 2층 계단이 내려오면서 제나가 나타났다.</p>
<p>“뭐야! 결국 수리한 건가? 로봇일 때가 훨씬 귀여웠는데. 그 노력을 다른데 기울였다면 좋았을 텐데.”</p>
<p>제나가 이렇게 말하자 레베카가 고개를 돌려 제나를 바라보았다.</p>
<p>“내가 계산한 바로는 이게 더 효율적이야. 저 느린 로봇은 별로 도움이 안 되니까. 그러니 내가 하는 일에 신경 끄는 게 어때.”</p>
<p>“원래 몸으로 돌아오니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는데?”</p>
<p>제나가 쓴 웃음을 지으며 내려와 헬릭과 통신장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p>
<p>“확인은 실컷 해봤어?”</p>
<blockquote class="third"><p>왜 처음에 쓰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가물하다. 요짐보의 SF버전을 쓰려다 아니다 싶어 버려진 행성 탈출기로 바뀐 것 같은데&#8230;&#8230; 탈출은 시키겠지만 이 뒤가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다. 이것 저것 생각나는게 많아서</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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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8220;벽장 안의 검객&#8221; 단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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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6 Dec 2010 01:30:07 +0000</pubDate>
		<dc:creator>김 승엽</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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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소설과 시]]></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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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벽장 안의 검객” 이란 제목을 친구에게 이야기 했을 때, 무슨 제목이 그러냐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스스로는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에게는 꽤 웃기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 일이 있은 뒤에 줄거리를 적어서 묵혀두다 지난 달에 완성해서 “문장”의 공모마당 쪽에 올렸다. 그리고 겁이 나서 어떻게 됐나 궁금해하면서도 못보고 있다가 살펴보고는 11월 월간 우수작으로 뽑힌 걸 발견했다. 아래는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벽장 안의 검객” 이란 제목을 친구에게 이야기 했을 때, 무슨 제목이 그러냐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스스로는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에게는 꽤 웃기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 일이 있은 뒤에 줄거리를 적어서 묵혀두다 지난 달에 완성해서 “문장”의 공모마당 쪽에 올렸다. 그리고 겁이 나서 어떻게 됐나 궁금해하면서도 못보고 있다가 살펴보고는 11월 월간 우수작으로 뽑힌 걸 발견했다. </p>
<p>아래는 소설가 김종일 씨로부터 받은 단평 </p>
<blockquote class="first"><p>전투 후 치명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장수 희문을 순박한 청년 조윤이 구해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쓰신 다른 SF연작보다 무협 쪽의 소설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만큼 이 소설은 서사가 안정되고 이야기의 완결성도 뛰어난 편입니다. 다만 반전을 포기하고라도 세강의 정체를 일찍 드러내어 그가 희문의 뒤를 쫓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더라면 긴장감이 훨씬 더 살아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p></blockquote>
<p>주인공을 죽일까 살릴까 고민했었는데 그 전에 세강이라는 인물의 등장시점에 대해 생각했었다면 이야기가 크게 달라져서 주인공을 살리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30대 엘리트의 몰락을 위해서 결국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p>
<p>단평에 무협 쪽의 소설이 SF 쪽 보다 낫다는 말이 있어서 그랬는지 문득 단평을 다 읽고 나서 이 소설과 연결되는 소설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최근에 읽은 소설이나 영화의 냄새가 묻어 있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좀 더 고민해 봐야겠지만 도장에서 쫓겨난 40대 애꾸 검객의 이야기인데 어떨는지 모르겠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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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벽장 안의 검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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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2 Dec 2010 02:07:36 +0000</pubDate>
		<dc:creator>김 승엽</dc:creator>
				<category><![CDATA[단편소설]]></category>
		<category><![CDATA[소설과 시]]></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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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벽장 안의 검객 풀벌레 소리로 소란스러운 녹음 가득한 산 길에 창이나 칼 따위를 제멋대로 짊어진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다. 뭔가를 찾는 듯 했지만 설렁설렁 주위를 둘러보거나 바닥의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툭툭 걷어차며 움직이는 모습은 기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이 산허리로 사라지자 길 옆 비탈에 쌓여 있던 낙엽더미 속에서 한 남자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것인지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벽장 안의 검객</strong></p>
<p>풀벌레 소리로 소란스러운 녹음 가득한 산 길에 창이나 칼 따위를 제멋대로 짊어진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다. 뭔가를 찾는 듯 했지만 설렁설렁 주위를 둘러보거나 바닥의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툭툭 걷어차며 움직이는 모습은 기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이 산허리로 사라지자 길 옆 비탈에 쌓여 있던 낙엽더미 속에서 한 남자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p>
<p>자신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가 말라붙어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입고 있는 갑주를 보아 일개 졸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무리가 사라진 방향을 살펴보고는 조심스레 산 아래로 움직였다. 허벅지에 박혀있던 화살은 꺾어내 반 토막이 나 있었지만, 옆구리의 화살은 온전한 상태였고 어깨에도 창에 찔린 상처가 있어서 남자의 움직임은 둔하고 엉성했다.</p>
<p>가파른 산 기슭을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내려가던 남자는 주변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피를 꽤 흘린 탓에 갈증이 심했고, 한 여름 무더위에 갑주와 검까지 차고 있는 바람에 몸이 온통 땀에 절어 있었다. 그 땀 때문에 말라 붙어 있던 피가 끈적여 물에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주위를 둘러보다 머지 않은 곳에서 산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실개천을 발견한 남자는 그 쪽으로 몸을 옮겼다. 먼저 목을 축인 뒤, 개천 옆 풀 숲에 몸을 숨기고 찢어낸 옷 조각에 물을 묻혀 피와 땀을 닦아내고는 뒤로 몸을 눕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p>
<p>‘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가?’</p>
<p>피를 닦아내자 서른 네댓 정도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각진 턱 선과 날카로운 눈초리 그리고 턱과 입 주변에 자란 수염은 흡사 귀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p>
<p>남자는 황제에 반하여 난을 일으킨 양하성 태수 주정안의 장수로 성은 감, 이름은 희문이었다. 수세에 몰려 곤경에 빠진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며칠 전 야습을 나섰다가 매복에 당해 부하를 모두 잃고 산 속으로 도망쳐 숨어있는 참이었다.<br />
희문은 얼굴을 마저 닦고 천 조각에 다시 물을 묻혀 목에 두른 뒤,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화살을 살펴보았다. 더 쉬이 움직이기 위해선 이것을 끊어내야 했지만 허벅지에 박혔던 화살과 달리 살짝 건드려도 통증이 극심해서 그것이 쉽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화살을 건드린 순간, 앞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희문은 숨소리를 죽이고, 몸을 낮추어 숨긴 채 기척이 난 방향을 살펴보았다. </p>
<p>나뭇짐 같은 것을 등에 짊어진 청년 하나가 냇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등에 졌던 것을 내려놓고 냇가에서 팔뚝을 씻던 청년의 행동이 일순 정지했다. 풀 잎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청년이 핏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기려는 것과 동시에, 희문이 튀어나와 검을 청년의 목에 들이댔다.</p>
<p>“움직이지 마라.”</p>
<p>희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청년의 움직임이 그대로 굳어버렸다.</p>
<p>“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p>
<p>겁에 질린 청년의 목소리에 희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실상 희문 자신도 어찌해야 할 지 몰랐다. 이 청년을 죽이고 자리를 떠나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살려 보내야 할지 양 갈래 길에서 고심했다. 청년의 목에 검을 댄 채 두 사람이 정지해 있는 사이, 풀 숲에서 메뚜기 한 마리가 날아 칼 등 위에 내려 앉았다. 희문은 잠시 머뭇거리다 칼 등에 내려 앉은 송장 메뚜기를 떨어내 듯 검을 거두었다.</p>
<p>“나를 보았단 소리를 입 밖에 내었다간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p>
<p>검을 거두고 괜한 협박으로 겁을 준 뒤 몸을 돌렸다. 그 때, 옆구리의 화살이 수풀 사이 낮게 올라온 밤나무 가지에 걸렸다. 순간, 희문은 옆구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p>
<p>말의 숨이 거칠었다. 희문은 허벅지의 화살을 꺾어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흥분 때문인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보다 자신도 모르게 너무 깊이 들어와 있었다. 야습을 감행한 것은 자신의 독단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에 혹여 실수라도 있을 때에는 목을 내놓아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이 예상하고 매복해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서둘러 병사들을 물렸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군율로 처벌받아 목이 떨어지는 것이나, 이대로 뚫고 가다 죽는 것이나 죽는 것은 매 한가지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사이 창이 어깨에 박혔다. 몸을 돌려 창을 잡고 실랑이 하다 중심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지며 통증에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어느 새 화창한 가을 풀 밭에 누워 있었다. 저 멀리 들꽃을 꺾어 든 연하의 모습이 보이고, 그 옆에 도장 동문인 유세강의 모습도 보였다. 희문이 이제 그녀가 이제 세강의 아내가 되었음을 떠올리는 순간, 눈 앞에 스승의 모습이 나타났다. 엄한 표정의 스승의 얼굴이 그가 마지막으로 벤 적병의 굳은 얼굴과 겹쳤다.</p>
<p>“어째섭니까?”</p>
<p>스승 앞에 무릎 꿇은 희문의 목소리가 떨렸다.</p>
<p>“내 딸 자식은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다.”</p>
<p>“그렇다면 어째서 제게 은월류 비검을 전수하신 겁니까?”</p>
<p>스승의 대답이 갑작스런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어둠 속에서 나타난 무리에 둘러싸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 멀리 본진에 불이 치솟는 것이 보인 것도 그 때였다.</p>
<p>“이제 정말 끝이구나.”</p>
<p>희문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언제 다가왔는지 옆에 서 있던 유세강이 그 너그러운, 희문이 그토록 싫어했던 얼굴로 말했다.</p>
<p>“아니야. 이제 시작이다.”</p>
<p>도장을 떠날 때 했던 세강의 말이 스산한 어둠 속에서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p>
<p>희문이 다시 눈을 뜬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꿈에 시달린 때문인지, 몸의 상처 때문인지 손가락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 자신이 낯선 방 안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아 챈 희문이 흠칫 놀라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 통증을 느끼고 신음을 흘렸다.</p>
<p>“여기는 대체……”</p>
<p>희문이 자신의 검을 찾으며 생각을 더듬는 사이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p>
<p>“더 누워계시는 게 좋을 텐데……”</p>
<p>아까 냇가에서 보았던 청년이 말 끝을 흐리며 희문 옆에 와 앉았다.</p>
<p>“어째서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거냐?”</p>
<p>“온 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그냥 놔두고 오겠어요.”</p>
<p>희문은 청년의 말에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청년의 말이 거짓 같진 않지만 그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다. </p>
<p>“어쨌든 신세를 졌지만, 날 못 본 척해야 할 거야.”</p>
<p>희문이 이렇게 말하고 이를 악문 채 몸을 일으켜 한 쪽에 놓인 갑주며 검을 끌어당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청년이 그의 손을 막으며 말했다.</p>
<p>“이대로 나가면 우리 집 울타리도 넘기 전에 쓰러질 거에요. 몸은 좀 추스르고 가세요.”</p>
<p>청년의 만류에 희문이 이내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산 속을 헤매던 때의 긴장이 조금 가신 탓인지 몸이 방바닥에 늘어 붙는 것 같았다.</p>
<p>“너, 내가 누군지 아느냐?”</p>
<p>의문에 물음에 청년이 가지고 들어온 멀건 죽을 희문에게 내밀며 말했다.</p>
<p>“그런걸 어찌 알아요? 그냥 전쟁에 나섰던 사람 같아 보인다는 것하고, 다친 사람이라는 것 밖엔 몰라요.”</p>
<p>청년의 겁 먹은 표정을 보며 희문이 몸을 일으킨 뒤, 죽 그릇에 담긴 숟가락을 집어 입에 가져갔다. 씁쓸하고 거칠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통증을 참으며 죽을 비우는 사이 청년이 말했다.</p>
<p>“다리하고 옆구리의 화살을 제가 뽑았는데, 일어나시질 않아서 이대로 죽나 싶었어요.”</p>
<p>“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p>
<p>희문의 물음에 청년이 손가락으로 셈해보더니 말했다.</p>
<p>“그러니까 제가 마을에 땔감 팔러 가려던 날이니 사흘 째에요.”</p>
<p>“그래… 그렇구나.”</p>
<p>희문이 죽 그릇을 비우고 팔꿈치로 움직여 벽에 상체를 기댔다. 저 청년의 단순한 호의인지 아니면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상황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산골 청년이 다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집으로 데리고 온 것으로 볼 수 있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근처에서 커다란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그 상대가 노인도 아닌 청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희문이 자신의 검이 세워져 있는 곳을 살폈다. 손이 닿기엔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희문의 속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청년이 일어나 갑주와 검을 희문의 옆으로 옮겨 놓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p>
<p>청년이 나가자 희문이 검을 당겨 손에 쥐고는 뽑아 보았다. 전쟁터의 흔적이 그래도 남아 있는 검을 손봐두고 싶었지만 이내 다시 집어 넣고는 원래 있던 자리에 세워놓았다. 지금 자신이 있는 집의 위치는 잘 모르지만 전에 보았던 패잔병 토벌대가 돌아와 이 주변을 다시 수색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몸이 나으면 서둘러 이 집을 떠나겠다고 마을 먹었지만, 실상 그가 갈 곳이 남아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돌아가도 처벌 받을 것이 분명했지만 도망칠 때 보았던 본진의 불길로 보아선 그 때의 전투에서 아군이 크게 피해를 입어 그나마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 지 고민이 되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간만의 포만감과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었다.</p>
<p>얼마나 지났을까? 희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청년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깨우고 있었다.</p>
<p>“숨어야 돼요. 산 쪽에서 횃불이 다가오는 것을 봤어요.”</p>
<p>청년은 이렇게 말하고는 벽장을 열어 검과 갑주를 집어 넣고 희문도 안에 들어가도록 한 뒤에 이불을 개어 희문과 검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 놓고는 벽장 문을 닫았다. 눅눅하고 고린 냄새가 나는 벽장 안에 몸을 웅크린 채 숨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벽장 문 너머로 작게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p>
<p>“무슨 일이세요?”</p>
<p>“이 주변에서 혹시 수상한 자를 보지 못했나?”</p>
<p>볼 수는 없었으나 토벌대가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p>
<p>“그런 사람은 못 보았는데요.”</p>
<p>청년의 목소리가 지나가고 나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 안에 들어온 기척이 느껴졌다. 희문이 벽장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쥐 한 마리가 가슴께로 내려왔다. 천천히 손을 뻗어 쥐를 움켜 잡은 순간 벽 쪽에 붙어있던 검을 건드렸는지 쓰러지며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밖에 있는 자가 듣지 않았을까 걱정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벽장 문이 벌컥 열렸다.</p>
<p>“네 놈 혼자 사나?”</p>
<p>“네! 그런데 왜 그러세요?”</p>
<p>청년의 물음에 대답 대신 창이 이불 사이로 찔러 들어왔다. 다행히 창이 이불에 걸려 희문에게 닿지는 않았으나 혹 이불을 걷어 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이 때, 희문이 손에 힘을 주어 쥐를 움켜잡아 이불 위로 올려놓자 찍찍 소리를 내며 벽장 밖으로 도망쳤다. 갑작스레 나타난 쥐에 벽장을 살피던 놈이 놀랐는지 작게 헉 하고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벽장 문이 닫혔다. 그리고는 나가는 기척과 함께 밖이 조용해졌다. 어두움과 정적 속에서 희문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크게 두근거렸다.</p>
<p>잠시 후, 청년이 벽장 문을 열었다.</p>
<p>“그 놈들 갔으니 이제 나오세요.”</p>
<p>이불을 치우며 청년이 말하자, 벽장 안에서 숨 죽이고 있던 희문이 땀 범벅이 돼서 밖으로 나와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p>
<p>“귀찮은 짓을 하는 구나. 그냥 여기 있다고 해도 됐을 텐데.”</p>
<p>“저 놈들 소문이 안 좋은 놈들이에요. 멀쩡한 사람도 패잔병으로 몰아 끌고 간다는 소문도 있어요. 아까 혼자 사냐고 물었을 때도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야 했는데 제가 깜빡 해서…… 아마 여기 숨겨준 걸 알았으면 분명히 저도 같이 끌고 가려고 했을 걸요.”</p>
<p>희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청년의 호의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성격이 서글퍼지면서도,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저 청년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p>
<p>“그러고 보니 네 이름도 묻지 않았구나?”</p>
<p>“이조윤이에요.”</p>
<p>“조윤이라.”</p>
<p>희문은 낮게 이름을 되뇌고는 말했다.</p>
<p>“나는 감희문이다. 상황이 좋지 않아 다른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내 너의 호의를 언젠가 꼭 보답하마.”</p>
<p>“뭘요. 어서 쉬세요. 저도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심심했는데 말 상대가 생겨서 좋은데요. 참! 놈들 얘기를 들으니 이번에 내려가서 다른 산으로 갈 모양이에요.”</p>
<p>“그래?”</p>
<p>희문은 이렇게 답하고는 다행이라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으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고작이었다.</p>
<p>희문이 조윤의 집에 숨어 지낸 지 열흘이 지났다. 그 사이 허벅지와 어깨의 통증은 많이 가셨지만, 옆구리의 통증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거동하는 것은 수월해져 일어서거나 걷는 것도 가능한 상태가 되었지만 밖에 나서기엔 부족해 방에 있는 일이 많았다. 또한 조윤이 집을 비운 사이 혹시라도 토벌대가 다시 이 쪽 산으로 돌아와 들이닥칠지도 몰라서 낮에는 벽장 안에 들어가 있곤 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조윤이 돌아오면 그에게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희문이 도망친 뒤, 양하성 군사들이 대패하고 성주도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마을에서 소문으로 들은 것을 전하는 것이라 확실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희문이 걱정했던 대로 끈 떨어진 연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었다. 고향에 남겨둔 가족이 없으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에 크게 미련은 남지 않았으나 그래도 돌아갈 곳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처벌을 감수하고 본대에 합류하거나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 지 걱정해야 했다.</p>
<p>희문이 자신의 처지를 고민하는 사이 조윤이 먹을 것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삶은 감자가 한 가득 들어있는 바가지를 바닥에 내려놓은 조윤은 언제나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일들을 들어놓기 시작했다. 혼자 산중에 지내다 희문과 함께 지내게 되니 말이 많아졌다고 조윤 스스로도 말하곤 했다. 그가 이야기한 내용 중에는 자신에 대한 것도 있었는데, 들어보니 벼슬을 하던 그의 아버지가 당쟁에 휘말려 죽고 난 뒤, 할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산 속에 숨어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조윤이라는 이름이 시골 청년의 이름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희문은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조윤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당쟁에 휘말려 죽은 아들 때문이었을까 손자를 그저 세상사에 관심 없는 평범한 촌부로 키우고 싶었던지 마을에 내려가는 것도 막고, 약초 캐고 농사 짓는 일만을 가르친 것 같았다. 그런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산에서 땔감이나 약초를 캐어 마을에 내려가 팔거나, 마을에서 일을 거들어 품삯을 받아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p>
<p>오늘은 마을에서 일을 도와주고 감자를 삯으로 받은 모양이었다. 희문에게 감자를 건네며 오늘 낮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던 조윤이 잠시 말을 끊었다. 뭔가 다른 이야기가 있어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얼마 지나 감자 하나를 집어 들더니 말했다.</p>
<p>“근데 오늘은 촌장 집 딸이 일을 도우러 나왔더라구요.”</p>
<p>뜬금없는 말에 희문이 슬쩍 조윤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낮의 일이라도 떠올리는지 멍한 눈 빛의 조윤을 보고는 희문이 어찌된 일인지 눈치를 채고는, 픽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p>
<p>“지금껏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지?”</p>
<p>“멀리서 몇 번 보긴 했는데, 산 아래로 일 도우러 다닌 지 얼마 안돼서요.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주로 약초만 캐고, 팔러 가시기도 할아버지께서 직접 가셔서……”</p>
<p>“아, 그랬군!”</p>
<p>희문이 맞장구를 쳐주자 조윤이 신난 듯, 오늘 본 촌장 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를 보고 웃었다느니, 허리가 잘록하다느니 하는 조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희문이 감자를 내려 놓고 뒤로 물러 앉으며 물었다.<br />
“그래, 말은 걸어봤나?”</p>
<p>“그게 촌장 어른도 같이 있어서요.”</p>
<p>“그럼 그냥 본 것뿐인데 그렇게 신이 나서 떠드는 거냐?”</p>
<p>“아니, 그건 아니고……”</p>
<p>조윤이 입을 다물자 희문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p>
<p>“첫 눈에 반하기라도 한 모양이군.”</p>
<p>“아니에요!”</p>
<p>금새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희문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p>
<p>“그럼 잊어버려라.”</p>
<p>“네?”</p>
<p>잊으라는 희문의 말에 조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p>
<p>“너 하는 꼴을 보니 혼자 끙끙댈 것이 안쓰러워 하는 소리다.”</p>
<p>조윤은 희문이 하는 소리에 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희문이 조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촌장 딸이 산 속에 혼자 사는 가난하고 외로운 청년에게 동정심을 보인 것 때문에 그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로 그럴 것이 처음 조윤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이지만 멀쩡한 허우대에 비해 더벅머리에 볕에 타 시커먼 얼굴이 여자들에겐 별로 매력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p>
<p>조윤은 잊어버리라는 희문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슬쩍 고개를 들어 희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p>
<p>“저 검 쓰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p>
<p>조윤의 말에 순간, 희문의 눈이 번쩍였다. 그것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기도 했고, 검을 배우겠다는 조윤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p>
<p>“뭐라고!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p>
<p>자신도 모르게 희문의 목청이 높아졌다.</p>
<p>“세상도 어지럽고…&#8230; 자기 몸은 지킬 수 있어야…… .”</p>
<p>“그런 이유라면 검은 배우지 않아도 된다.”</p>
<p>조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문이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와 분위기에 기가 눌렸는지 조윤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아주 당치 않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산골 청년에게 검은 괜한 위험만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희문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능하지 못했다. </p>
<p>‘내 검과 갑주 때문일까?’</p>
<p>아마 희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윤이 검을 배우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화가 끊어진 조용한 방 안에선 감자 먹는 소리만 가끔 들렸다.</p>
<p>그날 밤, 자고 있던 희문이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자리에 누워 있어야 할 조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한 희문은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조윤이 자신의 검을 들고 달빛 아래 비쳐보며 휘둘러 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째서 저 아이가 검을 배우고 싶어하는 것일까, 촌장 딸을 보고 와서는 검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 때문인가도 싶었다. 이미 거절한 일임에도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p>
<p>다음 날 조윤은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희문은 자신의 갑주와 검을 꺼내 정리한 뒤 벽장에 집어넣고, 방에 누워 옆구리의 상처를 살폈다. 많이 아물었지만 통증은 많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그 정도라면 열흘 정도 후에는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떠날 때에는 갑주는 조윤에게 주고 자신은 검만 들고 갈 생각이었다. 물론 갑주를 팔기 쉽지는 않겠지만 팔게 된 다면 그래도 꽤 값어치를 받을 수 있을 물건이라 자신을 도와준 답례로 주려는 것이었다. 검 한 자루만 들고 일단 고향 쪽에 몰래 숨어 들어가 상황을 살필 생각이었지만, 먼저 도장에 들러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장에는 누가 남아있을까. 스승님은 도망가셨고 세강도 도장을 잇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어쩌면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왠지 가보고 싶었다. 자신이 전수 받은 도장의 비검 때문이었지만 이내 스승이 비검을 전수하던 때의 일이 생각나 희문은 눈을 감았다. 아마도 세강과 자신 사이에 끼인 연하를 위해 스승이 그런 결정을 내렸으리라 여겼지만 그 때 들었던 이유는 언제 떠올려도 가슴을 파고드는 비수 같았다. 희문은 낮은 신음소리 같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p>
<p>그 날 저녁도 조윤은 촌장 딸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희문은 아무런 대답 없이 듣고 있다가 조윤이 열을 올리는 사이 툭 내뱉듯 말했다.</p>
<p>“그럼 내일은 가서 몰래 만나자고 해봐.”</p>
<p>희문의 말에 조윤이 큰일날 소리를 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p>
<p>“큰일나요. 촌장이 몰래 만난 걸 알기라도 하면……”</p>
<p>“그 처녀가 당연히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군.”</p>
<p>“네?”</p>
<p>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조윤의 눈이 커졌다.</p>
<p>“그렇게 해보고 만일 그 처녀가 약속한 곳에 나오면 내가 좋은 수를 하나 일러주마. 대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이제 그 처녀는 잊어버려라.”</p>
<p>“안돼요!”</p>
<p>“안되긴, 그럼 맨날 그렇게 그 처녀 이야기만 애먼 나에게 늘어놓다가 끝낼 셈이냐?”</p>
<p>“그래도……”</p>
<p>조윤이 망설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희문이 웃으며 말했다.</p>
<p>“내일도 촌장 집 일을 도와주러 가지? 잊지 말고 내가 시킨 대로 해봐.”</p>
<p>“…….”</p>
<p>조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그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여느 때보다 늦은 것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희문은 짐작할 수 있었다. 풀이 죽은 얼굴로 집에 돌아온 조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p>
<p>“네 얼굴을 보아하니 어떻게 됐는지 뻔하구나.”</p>
<p>희문의 말에 조윤이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을 붉히며 놀란 표정이 되어 손사래를 쳤다.</p>
<p>“아니에요. 만나자고 하지도 않았어요.”</p>
<p>“오호, 그래!”</p>
<p>거짓말 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희문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한 동안의 침묵 뒤에 조윤이 이제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p>
<p>“참! 그 패잔병 토벌대 놈들이 산적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안 그래도 요사이 안 보인다 했더니. 원래도 병사라기 보단 이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던 건달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놈 들이 뒷산에 터를 잡았는데 우리 마을로도 내려올까 봐 촌장님이 걱정을 하더라고요.”</p>
<p>“음, 그렇구나.”</p>
<p>희문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토벌대가 사라졌으니 이제 좀 편하게 지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p>
<p>“그래서 저기…… 혹시라도 놈들이 내려오면 저 혼자 사니까……”</p>
<p>“가지고 있는 것 순순히 내주고 시키는 대로 하면 죽이지는 않을 거다.”</p>
<p>희문의 말에 조윤이 목소리를 높였다.</p>
<p>“그럼 그런 놈들한테 빌면서 살란 말씀이세요?”</p>
<p>“빌면서 사는 게 싸우다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 괜스레 혼자 나서 봤자 너만 손해다.”</p>
<p>“싫어요! 벌써 그 놈들이 윗마을에서 난리를 쳤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버러지 같은 놈들한테 빌면서 살고 싶진 않아요.”</p>
<p>조윤이 쉽게 물러서지 않자 희문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p>
<p>“그러니 검을 가르쳐 달라는 말이지? 그런데 너 같은 녀석이 검을 배우면 그냥 지나칠 일들도 커져.”</p>
<p>“제가 목숨도 구해드렸는데 그 대신이라 생각하고 들어주세요.”</p>
<p>“뭐!”</p>
<p>순진한 줄로만 알았던 조윤이 생명의 은인을 들먹거리자 말문이 막힌 희문이 쓴웃음을 지었다.</p>
<p>“내 목숨 구해준 값을 내놓으라는 거구나. 그런데 그래도 싫다고 하면 어쩔 셈이냐?”</p>
<p>“관청에 가서 도망친 병사가 집에 숨어있다고 할거에요!”</p>
<p>조윤이 이렇게 소리치고는 자신도 놀랐는지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 모습에 희문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웃었다.</p>
<p>“좋아. 가르쳐 주마. 그러나 난 네 스승이 아니고 넌 내 제자가 아니다. 또 네가 배운 검은 은월류와는 상관이 없다. 알겠느냐?”</p>
<p>“그럼 언제부터 배우나요?”</p>
<p>조윤이 기뻐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희문은 방금 전 협박하던 때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는 순진한 미소를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p>
<p>“지금부터다. 그러니 오늘은 저 쪽 문 앞에서 서서 자라.”</p>
<p>“네?”</p>
<p>“자세는 다리를 벌린 기마 자세로, 눈은 내 미간을 노려보면서. 불을 끄더라도 내 미간을 보아야 한다.”</p>
<p>“네……”</p>
<p>왠지 미덥지 않은 표정의 조윤이 방 문 앞에 가 서자 희문은 그 앞에 누워 불을 껐다. 그리곤 아무런 말 없이 밤이 깊어갔다. 새벽녘에 조윤의 신음 소리가 희문을 괴롭혔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p>
<p>다음 날 새벽, 희문은 일어나 조윤이 주저 앉아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낮에 일하느라 피곤한 조윤이 새벽까지 버틴 것 만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어릴 적을 떠올렸다. 희문 역시 어릴 때 도장에서 저 훈련을 하며 몇 번이나 주저 앉았는지 몰랐다. 새벽 안개를 바라보던 희문은 마당 한 켠의 작대기를 들고 휘둘러 보았다.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아직 검을 휘두를 정도는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방 안에 들어갔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조윤이 자세를 잡고 서 있었다.</p>
<p>“됐다. 날이 밝았으니 그만 하고 앉아라.”</p>
<p>“네.”</p>
<p>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희문이 웃으며 말했다.</p>
<p>“그리고 오늘은 목검을 만들 나무를 구해 오거라.”</p>
<p>“네. 그런데 정말 검을 가르쳐 주시는 거에요?”</p>
<p>“왜? 이제라도 싫으면 안 배워도 된다.”</p>
<p>“아니에요.”</p>
<p>조윤은 다리를 주무르며 밖으로 나갔고 희문은 눈을 감고 누워 잠을 청했다. 그 역시 조윤을 보며 밤을 새웠기 때문에 자 두어야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이 다 나으면 떠날 생각만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까지 어느 수준까지 조윤을 가르칠 수 있을지 몰랐다.</p>
<p>“끝까지 가르치지 말았어야 했는데……”</p>
<p>생명의 은인이란 말과 협박에 가르치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실수를 한 것 같았다.</p>
<p>저녁이 되자 조윤은 다시 자리를 잡았고 희문은 조윤이 가져온 나무로 목검을 만들었다.</p>
<p>“내 미간을 계속 노려봐라.”</p>
<p>“네……”</p>
<p>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윤이 대답하자 희문이 다 깎은 목검 하나를 조윤에게 던져주어 잡고 있게 했다. </p>
<p>“그런데 이게 검 배우는데 도움이 되나요?”</p>
<p>“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p>
<p>귀찮은 듯 내뱉고는 다시 다른 목검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른 목검이 또 완성되자 희문은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그는 자지 않고 조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조윤의 눈을 노려보던 희문은 자세가 흐트러질 때 마다 자신의 목검으로 조윤의 목검을 올려 쳤다. 목검이 바닥에 떨어지면 희문의 목검이 조윤의 허벅지에 날아갔다. 그렇게 몇 번, 목검이 떨어진 뒤에는 더 이상 목검을 올려 치지 않았다. 그러다 밤이 깊어 조윤이 밀려오는 졸음에 꾸벅 존 순간, 어느새 뒤로 다가온 희문이 목에 목검을 들이댔다.</p>
<p>“목이 떨어졌다.”</p>
<p>순간 조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잠이 달아나 눈을 크게 떴다. 목검이었지만 마치 진짜 칼을 들이댄 듯한 위압감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두 남자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p>
<p>그 뒤로도 조윤의 수련은 주로 밤을 이용해 계속되었다. 매우 피곤할 터였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았다. 희문은 조윤의 습득 속도에 놀라고 있었다. 워낙에 체력이 좋아서 인지는 몰라도 검을 쓰는데 필요한 몸을 금방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다만 어둠 속에서 희문의 움직임을 쫓는 것 만은 쉽게 익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p>
<p>“자! 이제 몸은 어느 정도 된 것 같으니 다음을 해보자.”</p>
<p>스무 날이 지났을 무렵 희문은 은월류의 검세들을 가르치고 연습하도록 했다. 그러나 검세를 한 두 번 보여줄 뿐 직접 자세를 잡아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자세를 잡아주고 싶었으나 아직도 희문의 움직임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세를 보여주는 것이 고작이고, 잘못 된 부분을 반복하며 바로 잡아주기는 힘들었다. 다른 상처는 다 아물었으나 옆구리의 통증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밤에 계속하던 수련도 멈추었다. 어설펐지만 열에 서너 번 정도는 희문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계속할 수 있는 수련법을 가르치고는 더 계속하지 않았다. </p>
<p>희문의 마음 속에서는 조윤에게 검을 더 가르쳐야 하는지 하는 고민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자세가 끝나면 대련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조윤이 자신의 어설픈 검만 믿고 쉽게 검을 뽑으려 할 것 같았고, 반대로 여기서 그만 두게 되면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한 상태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결국 희문은 조윤에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때가 아니면 절대 검을 뽑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리고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데 신경을 써나갔다.<br />
희문이 조윤의 집에 머문 지도 석 달이 넘어 가을이 되었을 즈음 해서는 대련을 하기도 했다. 석 달도 되지 않은 조윤의 실력으로 희문을 이길 수는 없었지만 가끔 날카로운 공격을 하기도 해서 희문이 당황하는 때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검을 배우면서 하지 않던 촌장의 딸 이야기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검을 배우며 자신감이 생겼는지 전처럼 말도 제대로 붙여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희문이 보았을 때는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이었다.</p>
<p>두 사람이 대련을 마친 어느 오후, 희문이 조윤을 앉혀 놓고 말했다.</p>
<p>“이제 너 혼자 수련하는 일만 남았다. 계속 대련을 해서 실력을 쌓아야겠지만 나도 이젠 떠나야 하니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p>
<p>“네? 어디로 가시려고요.”</p>
<p>“일단 고향에 들러 볼 생각이다.”</p>
<p>“네…..”</p>
<p>조윤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느껴졌다.</p>
<p>“내 갑주는 두고 갈 테니 나중에 팔아서 쓰도록 해라. 이제 나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p>
<p>“언제 가실 거에요?”</p>
<p>“사나흘 뒤에 출발할 생각이다. 아침에 내가 보이지 않거든 떠날 줄 알거라.”</p>
<p>“……”</p>
<p>희문은 이렇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고 조윤은 마당에 멍하니 서있다가 수련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희문이 검을 만지고 있는 사이 마을에 내려갔던 조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p>
<p>“큰일났어요! 숙영이가 산적에게 끌려갔대요.”</p>
<p>“무슨 소리냐? 숙영이가 누군데?”</p>
<p>“촌장 딸이요.”</p>
<p>“그렇군. 그런데 그게 어쨌단 거냐?”</p>
<p>희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p>
<p>“가서 구해야죠!”</p>
<p>조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문이 그의 뺨을 때렸다.</p>
<p>“네 알량한 실력으로 말이냐?”</p>
<p>갑작스런 희문의 따귀에 할 말을 잊었는지 조윤이 입을 다문 사이 희문이 말했다.</p>
<p>“그 숙영이랑 아이가 네 정혼자라도 되느냐?”</p>
<p>“아뇨…… 하지만!”</p>
<p>“넌 구하러 가고 싶겠지만, 그 많은 놈들을 너 혼자 상대할 수 있단 말이냐?”</p>
<p>“……”</p>
<p>“네게 몇 번이나 일렀다. 네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면 검을 쓰지 말라고.”</p>
<p>“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갈 거에요. 그 산적 놈들 행패가 얼마나 심한데요. 관에서는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더 심해질 거라고요.”</p>
<p>“뭣이! 이놈이.”</p>
<p>희문이 소리를 질렀지만 조윤은 눈동자도 흩트리지 않았다. 여자 때문이란 말은 쑥 들어가고, 산적의 행패 때문이란 말이 나오자 희문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어설픈 검 실력과 젊은 혈기 탓에 목숨을 버리려 하는 모습에 희문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p>
<p>“좋다. 내가 말려도 네 놈이 갈 것 같으니 내가 몇 가지 더 알려주마.”</p>
<p>“네?”</p>
<p>“네가 살 길을 몇 가지 더 알려주겠다는 것이다.”</p>
<p>희문은 이렇게 말하고는 목검을 들고 조윤과 마주서서 말했다.</p>
<p>“네게 처음에 검을 가르칠 때 어둠 속에서 내 미간을 보도록 한 것을 기억하느냐?”</p>
<p>“네.”</p>
<p>“어둠에 익숙한 자는 능히 열 명도 상대할 수 있다. 자신의 기척까지 숨길 수 있다면 스물도 상대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어둠이 되면 능히 백도 상대할 수 있다. 그게 은월류다.”</p>
<p>“네!”</p>
<p>“내가 가르친 검은 원래 그런 목적의 것이다. 하지만 너는 수련이 부족해 어둠 속에서 적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 초승달이 뜬 밤에 검은 칠을 하고 놈들의 본거지에 가거라. 그러면 아마 적은 너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p>
<p>“하지만 아직 초승달이 뜨려면 이틀 정도나 남았는데……”</p>
<p>“그리고 자 지금부터 내 검을 막고 공격해 보아라.”</p>
<p>희문이 조윤의 말을 못 들은 척 검을 잡고 섰다. 그리고는 조윤이 자세를 잡는 것과 동시에 조윤의 바로 코 앞을 스치듯 휘둘러 등을 보였다. 그 틈을 노리고 조윤이 등을 베어 들어오는 찰라, 희문의 몸이 반 바퀴 돌면서 옆으로 움직였고 목검은 조윤의 목에 맞고는 떨어졌다.</p>
<p>“내가 검을 놓지 않았다면 네 목은 떨어졌을 것이다. 이것을 달 그림자 옮기기라고 한다.&#034;</p>
<p>놀란 조윤의 얼굴을 보며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검을 휘둘러 등과 어깨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윤의 옆구리서 목검이 멈추었다.</p>
<p>“달 그림자 옮기기는 크게 반원을 그리며 움직여 목을 노리는 기술이지만 상대에 따라 옆구리나 팔을 노릴 수도 있다. 해보거라.”</p>
<p>희문의 말에 조윤이 따라 하자,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말했다.</p>
<p>“자, 이번에는 공격해 보거라.”</p>
<p>조윤이 이번에는 자세를 가다듬고 마주 서 공격을 시작했다. 상단과 하단으로 이어지는 공격에 뒤로 물러서던 희문이 순간 목검을 날리자 조윤의 이마에 붉은 선이 생겼다. 목검이 닿지 않을 거리라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희문이 검을 잡은 손을 보여주었다.</p>
<p>“엄지, 검지, 중지로만 검을 잡고 쓰는 것이다. 원래는 눈에 비친 반딧불 빛을 보고 벤다고 해서 반딧불 베기라고 하지만 눈 뿐 아니라 상대의 목, 팔목, 이마도 노려 사용할 수 있다. 상대와의 거리를 무너뜨리고 공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벌레를 베듯 가볍고 빠르게 베어야 한다. 해보거라.”</p>
<p>희문은 조윤에게 두 가지 기술을 전해 주고는 말했다.</p>
<p>“지금부터 이 두 가지를 연습하거라. 그리고 이틀 뒤 밤에 가는 거다. 알겠느냐?”</p>
<p>“하지만 그렇게 늦으면……”</p>
<p>“난 네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주었다. 그러니 그 이후는 네 맘대로 하거라. 목숨 귀한 줄 모르는 놈에게 나도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p>
<p>“알겠습니다.”</p>
<p>조윤이 풀 죽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희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p>
<p>“검도 없이 갈 테냐? 내 갑주를 가지고 마을에 가서 쓸 만한 검도 구해오거라. 장식이 많이 되어 있는 검은 쓸 만한 것이 못 되니 거들떠 보지도 말고, 직접 만져보고 골라오거라.”</p>
<p>“예.”</p>
<p>조윤이 대답하고는 갑주를 들고 산 아래로 사라지자 희문은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검을 휘둘러 보았다. 다 아물긴 했지만 가끔 통증이 있는 옆구리를 만져보고는 음 하고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한참 지나 마을에 갔던 조윤이 검을 구해오자 희문이 검을 살펴보고는 말했다.</p>
<p>“꽤 쓸만해 보이는 구나. 어디서 구했느냐?”</p>
<p>“마을 노인 하나가 전쟁터에서 검 몇 자루를 주워서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다 장식 붙은 것들뿐인데 요거 하나만 아니더라고요.”</p>
<p>“그래 잘했다. 그럼 이 검으로 아까 가르쳐 준 것을 연습하거라.”</p>
<p>“네.”</p>
<p>“그리고 난 내일 떠날 테니 그리 알아라.”</p>
<p>“네?”</p>
<p>갑작스런 말에 조윤이 놀란 듯 쳐다보았다.</p>
<p>“네 놈 죽는 꼴 보기 싫어서 하루라도 먼저 가려는 것이다. 부디 그 촌장 딸 구해서 잘 살아보거라.”</p>
<p>“그래도 이렇게 떠나시면…….”</p>
<p>“내가 네 놈 죽으러 가는 길 도와주기라도 할 줄 알았느냐? 네 놈 성화에 검까지 가르쳐줬으니 같이 죽어달라는 말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혹 그 처녀가 안 따라오려고 하거든 설득 같은 것 하지 말고 얼른 도망치고.”</p>
<p>“왜 안 따라오겠어요.”</p>
<p>“멍청한 놈! 너 같은 놈과 엮이느니 산적이랑 사는 게 속 편하지 않겠느냐! 하하하.”</p>
<p>희문이 짐짓 소리 내 웃었다. 하지만 조윤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p>
<p>“사람을 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명심해라. 베고 난 뒤도 문제지만 지금은 그저 너 사는 것만 생각하거라.”<br />
희문은 이 말을 남기고는 방으로 들어갔다.</p>
<p>그날 밤, 조윤이 잠든 사이 희문이 검을 들고 방을 나왔다. 산을 내려가 이대로 떠날 생각이었다. 검을 가르치며 정이 들긴 했지만 혼자 죽으러 가겠다는 놈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도 이제 어찌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조윤의 일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p>
<p>“내 할 도리는 다했다.”</p>
<p>마당에 서서 방 문을 바라보며 희문은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길을 나섰다. 조윤을 도우려던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윤이 마을에 내려간 사이 검을 써 보았을 때 옆구리에 통증이 있는 것을 느끼고는 마음을 접어버렸다. 괜한 일,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위험을 감수하며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산 길을 따라 마을을 내려가던 희문이 멈춰 섰다. 자신에게 비검을 전수하며 스승이 했던 말이 그의 발걸음을 잡고 있었다.</p>
<p>그 날, 희문은 유세강과 연하가 만나는 장면을 보고 도장에 돌아와 있었다. 질투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때는 검을 잡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도장 벽의 목검을 물끄러미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때, 도장 문이 열리며 스승이 들어왔다.</p>
<p>“뭘 하고 있는 거냐?”</p>
<p>“아무것도 아닙니다.”</p>
<p>희문이 이렇게 말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자 스승이 문으로 되돌아가며 말했다.</p>
<p>“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오거라. 목검도 두 개 가져오고.”</p>
<p>스승의 갑작스런 부름에 희문이 무슨 영문인지 생각하다가 따라 나섰다. 스승이 향한 곳은 도장 뒷 편의 산마루였다. 산 위에 도착하자 스승이 천천히 다가와 희문의 손에 들린 목검을 한 자루 받아 들고는 말했다.</p>
<p>“연하를 세강에게 시집 보낼 생각이다.”</p>
<p>“…….”</p>
<p>&#034;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알고 있다. 검도 네가 위고, 집안도 네가 낫지. 연하가 너와 세강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던 것도 알고 있다.”</p>
<p>“세강에게 도장을 이어가게 하실 겁니까?”</p>
<p>“그래야겠지. 하지만 꼭 강요할 생각은 없다.”</p>
<p>“…….”</p>
<p>희문은 입을 다물었다. 스승은 잠시 산 아래를 내려다 보더니 말했다.</p>
<p>“연하가 널 택했더라도 난 너에게 도장과 딸을 맡기지는 않았을 거다.”</p>
<p>“어째섭니까?”</p>
<p>스승의 말에 희문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p>
<p>“넌 도장에 묶여 있을 놈이 아니다. 네 야망이 이 촌구석에 묶여있을 리가 없지. 난 내 딸이 평온히 살았으면 좋겠다.”</p>
<p>“어째서 그렇게 단언하십니까? 저도 도장을 이어 받아 조용히 살 수 있습니다.”</p>
<p>“그래. 연하 때문에 처음 몇 년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국 너는 가만히 머물러 도장 수련 생이나 가르치고 있진 않을 거야.”</p>
<p>“아닙니다. 저도…….”</p>
<p>희문이 마지막으로 부정해 보았으나 더 말을 잇지는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들켜 버린 것 같아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p>
<p>“난 네가 더 좋다. 남자로서는 네가 더 마음에 들어. 그래서 너를 이 곳에 가둬둘 수가 없다. 대신 네게 마지막으로 은월류 비검을 전수해 주마.”</p>
<p>“비검은 모두 전수 받지 않았습니까?”</p>
<p>세강과 희문 모두 두 개의 비검은 전수 받았다. 달 그림자 옮기기와 반딧불 베기라는 두 비검을 몇 년이나 수련해 오고 있었다. 희문의 물음에 스승은 목검을 세우고 말했다.</p>
<p>“한 가지가 더 있다. 은월류 수제자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검이…… 네게 그것을 전수해 주마.”</p>
<p>스승의 말을 희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비검 중의 비검을 전수하겠다는 말 인가. 세강에게 전수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희문의 가슴이 이런 의문들로 뛰기 시작할 때 스승이 말했다.</p>
<p>“넌 어디서든 살아남을 것이다. 세강은 너무 곧기만 해서 쉽게 부러질지도 몰라. 내가 무관이 되지 못하고 도장이나 열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지. 하지만 그래선 은월류는 이름만 남은 껍데기가 될 것이 뻔하다. 도장은 사라지더라도 은월류가 사라지는 것은 안 된다. 그러니 목적을 위해선 어떠한 수단도 마다치 않는 너 같은 이가 이 비검을 물려 받는 것이 나을 것이다. 도장을 이어나갈 네 사형을 모함해 낙향하게 하고 연하를 차지하기 위해 세강에게 함정을 팠던 것도 알고 있다. 이기적이고 음흉하지. 내 평가가 너무 박하다고 생각지는 말아라. 사위로 받아들이긴 힘들지만 무사로서는 너를 택한 것이니.”</p>
<p>스승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세를 잡더니 말했다.</p>
<p>“다만 나중에 내가 죽고 네 마음이 내키거든 세강에게도 네가 가르쳐 주거라. 자! 보거라.”</p>
<p>“내가 어떻게든 살아 남아 공을 세우고 은월류의 이름을 알릴 거라 생각하셨겠지!”</p>
<p>옛 일을 생각하며 멈춰 섰던 희문이 한 걸음 걷더니 다시 멈추어 섰다.</p>
<p>“내가 살아 남기 위해선 다른 사람은 개의치 않는 놈이라는 것이겠지.”</p>
<p>희문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p>
<p>“저 녀석에게 검을 가르쳤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일인지도 모르지.”</p>
<p>무슨 생각이었을까? 지금껏 가슴에 숨겨 두었던 스승에 대한 반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돌아갈 곳 없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자포자기 같은 심정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희문은 발 길을 돌려 산으로 향했다. 산적 놈들의 위치는 조윤에게 들어 대략 알고 있었다. </p>
<p>“전쟁터에서 도망쳐서 산적에게 죽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하늘에 계신 스승님께선 내가 이렇게 되리라곤 짐작도 못하셨겠지. 하하하!”</p>
<p>산 길을 타고 올라 산적 소굴에 도착해서 희문은 수풀에 몸을 숨기고 산적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한 가운데 모닥불을 피운 채, 십 수명의 산적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끌려온 여자들은 한 쪽에 묶여 있었다. 세 명의 젊은 처녀들로 겁에 질려 소리도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p>
<p>그 때, 한 놈이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이끌려 온 것은 마을 처녀로 보이는 여자였다. 옷 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아 대충 어떤 일을 당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런데 희문을 놀라게 한 것은 수풀에서 등장한 산적의 정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세강이었다. 고향에 내려갔다고 했던 세강이 흐트러진 머리로 생전 볼 수 없었던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거기 서 있었다.</p>
<p>‘네가 왜 여기 있느냐?’</p>
<p>희문은 순간 이 해괴한 재회에 몸을 떨었다. 행색을 보아서는 세강 역시 태수의 편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왜 그와 만나지 못했을까? 그보다 어째서 그가 저 산적 아니 패잔병 토벌대와 어울려 산적질을 하고 있을까? 갖가지 의문들이 희문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 때, 세상이 산적들 사이에 주저 앉더니 말했다.</p>
<p>“이제 네 놈들 차례다.”</p>
<p>그 말에 산적 예닐곱 놈이 왁자지껄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 쪽에 묶여 있던 처녀들을 하나씩 끌고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희문은 세강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수풀로 들어간 산적과 처녀들의 뒤를 따랐다. 여자들의 비명소리를 쫓아간 희문은 여기저기 흩어져 처녀를 겁간하려던 산적들 뒤로 다가가 놈들을 해치웠다. 무기도 들지 않은 상태에다 두세 놈씩 떨어져 있어서 큰 어려움도 없이 처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선 겁 먹은 얼굴로 희문을 보던 처녀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속삭였다.</p>
<p>“누가 촌장 딸이냐? 숙영이라던가?”</p>
<p>그러자 그 중 한 처녀가 입을 열었다.</p>
<p>“저에요.”</p>
<p>얼굴에 흙칠을 한 처녀를 보고 희문이 웃음을 지었다. 겁탈을 피하려고 일부러 얼굴에 흙칠을 한 것 같았다.</p>
<p>“똑똑해 보이는 구나. 너 조윤이라는 녀석을 아느냐?”</p>
<p>처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희문이 말했다.</p>
<p>“그 녀석이 보내서 왔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은 아느냐?”</p>
<p>“네.”</p>
<p>“그래. 그럼 어서 다른 처녀들과 함께 내려가거라.”</p>
<p>마을 처녀들이 사라지고 나자 산 적 두 놈이 수풀 속에 들어왔다가 희문에게 목을 베어 쓰러졌다. 뭉쳐서 한꺼번에 공격하지 않는다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녀석들 이었다. 두 놈을 처리하고 남아 있는 것이 세강과 산적 두어 명이란 것을 떠올린 희문이 모닥불 쪽으로 걸어 나갔다.</p>
<p>“세강!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거냐?”</p>
<p>갑작스런 등장에 놀랐는지 산적 세 놈이 놀라 일어나며 희문을 향했다.</p>
<p>“어째 주변이 조용한 게 불청객이 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게 너 인줄은 몰랐군.”</p>
<p>“나도 네가 전쟁에 나선지는 몰랐다.”</p>
<p>“흐흐…… 앉아라 간 만에 만났는데 술 한잔 해야지.”</p>
<p>“술이라. 네가 술을 즐기는 줄은 몰랐군.”</p>
<p>“하하하……. 세월이 흘렀으니.”</p>
<p>희문이 세강 쪽으로 다가서자 산적 세 놈이 물러서다 희문의 옷자락에 피가 묻은 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p>
<p>“두목, 이 놈이 다른 녀석들을 다 죽인 것 같은데요!”</p>
<p>산적의 떨리는 목소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세강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p>
<p>“그럴 거야. 우리가 잡아온 처녀들도 다 놓아줬겠지.”</p>
<p>“에! 그런데 가만히 있는 겁니까?”</p>
<p>산적 놈들이 무기를 세우며 소리치자 세강이 놈들을 흘깃 쳐다보고는 말했다.</p>
<p>“오랜만에 만난 친구라서 말이지. 할 이야기고 있고. 하지만 네 놈들이 죽여야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p>
<p>세강이 이렇게 말하고 모닥불에 나무를 던져 넣자, 세 놈이 희문을 에워쌌다. 희문이 뒤로 물러나며 세 놈을 살피는 사이, 뒤 쪽에서 검은 형체가 하나 튀어나와 맨 왼쪽에 창을 들고 있던 놈의 옆구리를 찌르고는 물러섰다.</p>
<p>“네가 어찌 여기에 왔느냐?”</p>
<p>“자다 깨서 보니 안 계시길래……”</p>
<p>희문은 이틀을 더 기다리라고 했건만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산에 올라온 조윤을 꾸짖었다. 하지만 조윤은 희문이 이 곳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뒤를 따라온 것이었다. 희문의 여름철 소나기 같은 변덕과 그 간 품어왔던 스승에 대한 응어리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조윤의 등장에 세강이 웃으며 말했다.</p>
<p>“뭐지? 일행도 있었는가?”</p>
<p>희문은 갑작스레 등장한 조윤으로 인해 산적들이 당황하는 틈을 노려 순식간에 한 놈의 가슴을 비스듬히 베고는 그대로 옆의 놈의 배를 가로로 갈랐다. 두 놈이 쓰러지자 세강이 쓰러진 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p>
<p>“꽤 부려먹기 좋은 놈들이었는데 아쉽군.”</p>
<p>희문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조윤에게 말했다.</p>
<p>“넌 내려가거라.”</p>
<p>“아니지. 젊은 친구 자네도 이리로 오게.”</p>
<p>세강이 이렇게 말하고는 조윤에게 손짓을 했다. 희문은 모닥불 쪽으로 다가가려는 조윤의 팔을 잡아 멈추고는 세강의 맞은 편에 앉았다.</p>
<p>“연하는 잘 지내는가?”</p>
<p>“음 그렇겠지. 왜 옛날에 흠모하던 이가 궁금한가?”</p>
<p>남의 일처럼 말하는 세강의 표정에 희문의 얼굴이 굳었다.</p>
<p>“변했군.”</p>
<p>“네가 알던 유세강은 아니지.”</p>
<p>“어째서 도장을 지키지 않고 전쟁터까지 나오게 되었나?”</p>
<p>“진짜 후계자가 있는데 허수아비가 도장을 지킬 수 있나.”</p>
<p>“그게 무슨 소리냐? 연하와 혼인한 것은 네가 아니냐?”</p>
<p>희문이 소리치자 순간 세강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p>
<p>“네게 전수해 주신 비검 말이다.”</p>
<p>비검이란 말에 희문이 세강을 노려보았다.</p>
<p>“비검이라니 무슨 말이냐?”</p>
<p>“연하에게 들었다. 스승께서는 처음에는 모른다고 하시더군.”</p>
<p>“그런 것이 있었나?”</p>
<p>짐짓 모르는 척 희문이 대답하자 세강이 킥킥거리며 말했다.</p>
<p>“네게 전수 하셨다는 것 알고 있다. 돌아가시기 전에 네 이야기를 하시더군.”</p>
<p>“끝까지 비밀로 하실 것 같더니……”</p>
<p>“그래, 연하를 빼앗기고 날 허수아비 후계자로 만들어 놓으니 속이 풀리더냐?”</p>
<p>“난 바라지 않았던 일이다.”</p>
<p>“그래?”</p>
<p>“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그 비검을 네게 알려줄 수 있다.”</p>
<p>희문이 이렇게 말하자 세강이 큰 소리로 웃더니 말했다.</p>
<p>“우리 둘 다 전쟁에서 패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리라곤 스승님도 짐작하지 못하셨겠지.”</p>
<p>“흠, 그 강직한 유세강이 산적이 되어 여자나 겁탈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더 모르셨을걸.”</p>
<p>“크크크, 네가 산적에게서 처녀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사내가 될 것도 모르셨을 테지. 너야 네 한 몸 건사하는 것 외에는 관심 없는 놈이었으니.”</p>
<p>세강의 말에 희문의 얼굴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p>
<p>“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넌 어찌할 생각이냐?”</p>
<p>“그래? 난 너와 승부를 내 볼 생각인데.”</p>
<p>세강의 말을 듣고 희문이 한 숨을 내쉬었다. 변한 유세강과 마주쳤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유세강과 겨룰 생각은 없었다. </p>
<p>“단지 비검 때문에 이렇게 변한거냐?”</p>
<p>“연하와의 결혼을 허락하신 순간, 나는 스승님께서 완전히 나를 후계자로 인정하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가 도장을 떠나고 나서 스승님께서 네게 비검을 전수하신 걸 알고 참을 수가 없었지. 연하가 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스승님께서 네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네 놈이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p>
<p>“그래? 연하를 빼앗기고 그 비검을 대신 전수 받고 쫓겨난 내 마음을 네가 알 수 있겠느냐? 참을 수가 없었다고? 진정 참을 수 없었던 건 나였다.”</p>
<p>“후후, 자 그러니 여기서 결판을 내는 거다!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p>
<p>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강이 일어나 검을 뽑았다. 희문도 더 이상은 참지 않고 검을 뽑고는 뒤로 물러섰다. 모닥불 빛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렸고 조윤은 멀찍이 물러서 아무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p>
<p>“원치 않는 대결이긴 하지만 산적에게 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보다는 낫구나.”</p>
<p>“패잔병의 꾀임에 빠져 산적이 된 멍청이들에게 천하의 조희문이 죽을 리가 있나? 하하하”</p>
<p>“토벌대 놈들을 꼬여 산적을 만들다니 유세강이야 말로 대단하구나!”</p>
<p>“크크크, 그래 그 비검을 쓸 셈이냐?”</p>
<p>“네가 원한다면!”</p>
<p>“좋아.”</p>
<p>“혹 내가 죽거든 저 아이는 내려 보내라. 우리와는 상관없는 아이다.”</p>
<p>“알았다.”</p>
<p>대화가 끝나고 마주 선 두 사람의 검이 순간 번쩍이더니 유세강의 베기를 흘려 보낸 희문이 뒤로 물러서 이어진 달 그림자 옮기기를 피하고 반딧불 베기로 세강의 손목을 노렸다. 그러나 세강의 검이 안 쪽으로 파고 들어 그것을 막고 역으로 희문의 옆구리를 파고 들어왔다. 그것을 피하지 못한 희문이 옆구리를 찔려 쓰러지자, 옆에서 보고 있던 조윤이 끼어들어 이어진 세강의 공격을 막았다.</p>
<p>“뭐하는 짓이냐!”</p>
<p>희문이 얼른 일어서 조윤을 밀쳐내고는 세강 앞에 섰다.</p>
<p>“네가 비검을 쓰려던 것을 저 아이가 막았나?”</p>
<p>“아니. 죽을지 모르고 끼어든 거지.”</p>
<p>“네가 가르쳤구나. 저 자세는 은월류가 아닌가…….”</p>
<p>순간 조윤을 바라보는 세강의 눈이 빛났다. 그 눈빛의 뜻을 알아차린 희문이 검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p>
<p>“자 이제 진짜 비검을 보여주마.”</p>
<p>세강도 희문의 말에 자세를 바로 잡았다. 희문이 먼저 검을 크게 휘둘러 세강에게 어깨를 내보였다. 달 그림자 옮기기의 바로 그 자세였다. 세강이 그것을 눈치채고 하단에서 검을 올려 치려는 순간, 희문이 몸이 한 바퀴 돌았다. 그러나 검은 따라 돌지 않았다. 대신 희문의 품에 있던 검이 비스듬히 위로 솟구쳐 세강의 갈비뼈 밑에서 어깨를 뚫고 박혔다.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던 희문이 천천히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p>
<p>“이건가?”</p>
<p>세강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p>
<p>“그래. 비검이라곤 하지만 결국 달 그림자 옮기기와 반딧불 베기를 합쳐 변형한 것이다. 상대의 턱에서 머리를 관통시켜야 하는 기술이지만 크게 쓸모 있는 기술은 아니지.”</p>
<p>“그런가?”</p>
<p>“그래. 달 꿰뚫기 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지.”</p>
<p>“너도, 나도 그 노인네에게 속았구나. 큭”</p>
<p>세강이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검을 뽑으려다 뒤로 쓰러졌다. 희문은 천천히 다가가 아직도 부릅뜨고 있는 눈을 감겨주고는 조윤에게 다가갔다.</p>
<p>“자. 이제 가거라. 그 처녀는 아까 내려 보냈다.</p>
<p>“예.”</p>
<p>“마지막 네가 쓴 검을 봤느냐?”</p>
<p>“예!”</p>
<p>“그래. 결국엔 네가 은월류를 이어 받게 되는 모양이구나.”</p>
<p>희문이 이렇게 말하고는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았다. 조윤이 놀라 다가와 그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희문이 만류하며 말했다.<br />
“아까 옆구리를 찔린 것이 좋지 않았다. 예전에 활을 맞았던 그 곳이야.”</p>
<p>그 말에 조윤이 옷섶을 헤쳐 그의 옆구리를 살폈다. 생각보다 깊은 상처에 피뿐 아니라 고름 같은 것도 비치고 있어 심상치 않아 보였다.</p>
<p>“조금 더 쉬시면 괜찮아지실 거에요.”</p>
<p>“아니다. 네 덕분에 이나마도 버틴 거야. 마지막에 그게 제대로 들어갈지도 확실치 않았다.”</p>
<p>희문이 이러게 말하고 눈을 감자 조윤이 흔들어 깨웠다.</p>
<p>“왜 이러세요. 정신 차리세요!”</p>
<p>“스승님께선 맞추신 게 하나도 없구나. 미안하지만 네가 청이 하나 있다. 은월류 도장을 찾아가 정연하라는 사람을 찾아서 나와 저 친구의 검을 전해주거라. 그리고 네가 배운 비검도 전수해주고.”</p>
<p>“제가요?”</p>
<p>“그래, 다만 전수하고는 바로 도망치거라. 어디 사는 누구라는 것도 알리지 말고, 그래야 검 따위는 버리고 숙영이란 처녀와 결혼도 할 수 있을 테니.&#034;</p>
<p>“예…….”</p>
<p>희문은 조윤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어느 새 동이 터오는 지 주위가 밝아오고 있었다. 흐릿한 눈을 비비고 싶었지만 손을 들 수가 없었다.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좋았을 것을, 적어도 스승님의 말 한가지는 맞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했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희문이 손을 뻗어 조윤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p>
<p>“이제 어째서 검을 가르치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겠느냐? 검을 배우면 나처럼 제 목숨 아까운 것을 잊어버리고 말아. 하하하”</p>
<p>마지막 힘을 짜낸 희문의 허튼 웃음 뒤로 아침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p>
<p><strong>끝</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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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8220;Selin &#8211; 마녀, 여왕이 되다&#8221; 단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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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4 Oct 2010 10:05:26 +0000</pubDate>
		<dc:creator>김 승엽</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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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이번에 문장 공모마당 장르 부분에 응모해서 소설가 김종일씨로부터 단평을 받았다. 감찰 임무를 띠고 일군의 용병대에 합류하게 된 ‘나’가 작전 지역에서 본색을 드러낸 ‘마녀’와 맞닥뜨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소설입니다. 한데 필요 이상으로 깁니다. 군더더기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도 많으며, 생략되어야 하는 대목은 길게 늘어지고 설명이 필요한 대목은 건성으로 넘어간다는 느낌도 곧잘 듭니다. ‘나’가 작전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이번에 문장 공모마당 장르 부분에 응모해서 소설가 김종일씨로부터 단평을 받았다.</p>
<blockquote class="first"><p>감찰 임무를 띠고 일군의 용병대에 합류하게 된 ‘나’가 작전 지역에서 본색을 드러낸 ‘마녀’와 맞닥뜨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소설입니다. 한데 필요 이상으로 깁니다. 군더더기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도 많으며, 생략되어야 하는 대목은 길게 늘어지고 설명이 필요한 대목은 건성으로 넘어간다는 느낌도 곧잘 듭니다. ‘나’가 작전 지역에 감찰관으로 합류하게 되는 초반부도 우연적이고 작위적이며(GPC의 인사 담당자는 대체 ‘나’의 무엇을 믿고 특수 목적 부서들을 감찰하는 중대한 임무를 떡 하니 맡기는 걸까요?), 간간이 적지 않은 비중으로 등장하는 전투 장면들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습니다(위성 레이저 공격까지 이용될 정도로 최첨단을 달리던 전투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번번이 백병전으로 전환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의 경호를 맡은 에린이라는 여인이 이 소설의 제목이 가리키는 ‘마녀’라는 사실은 초반부터 쉬이 짐작할 수 있지만, 그녀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소설이 결말에 다다른 후에도 명확해지지가 않습니다. 에릭을 비롯한 용병들이 그토록 싱겁게 에린과 타협하는 이유며, 에린이 기껏 ‘나’를 살렸다가 허망하게 죽이는 이유도 마찬가지이고요. &lt;마녀, 여왕이 되다&gt;는 프롤로그가 근사하고 여러 SF적 설정이 상세하고 튼실한 소설이지만, 정작 그 프롤로그와 설정이 떠받쳐줘야 할 이야기는 불분명하고 부실한 소설입니다. 무성한 잔가지들은 과감히 쳐내고 밑동을 굵직하게 키우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p>
</blockquote>
<p>너무 오래 끌어서 지지부진 했던 글을 억지로 마치고, 공모에 올리면서 걱정했던 것들이 이 평을 읽고 났더니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분량은 중편 가까이 되어가니……</p>
<p>사실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에 가장 큰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그 부분들이 부실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 같다. 다시 고쳐봐야겠다는 엄두도 나지 않아서, 아무래도 이 소설을 고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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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elin &#8211; 마녀, 여왕이 되다 #1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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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5 Oct 2010 03:07:31 +0000</pubDate>
		<dc:creator>김 승엽</dc:creator>
				<category><![CDATA[단편소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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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연재글 목록 보기 &#187; 대관식 전야 멍한 정신으로 다시 눈을 뜬다. 마약성 진통제의 영향 때문인지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오른팔에는 피가 수혈되고 있었고 복부의 상처도 치료가 끝난 상태였다. 억지로 일어나려는 내 팔을 누군가 잡아 당겼다. 에릭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더 누워있는 게 나을 거야.” 총으로 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걱정해 주는 듯한 모습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unfusion.kunsan.ac.kr/word/archive/1296#SID1296_1_tgl" title="See post to check out spoiler" class="internal">연재글 목록 보기 &raquo;</a></p>
<p><b>대관식 전야</b></p>
<p>멍한 정신으로 다시 눈을 뜬다. 마약성 진통제의 영향 때문인지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오른팔에는 피가 수혈되고 있었고 복부의 상처도 치료가 끝난 상태였다. 억지로 일어나려는 내 팔을 누군가 잡아 당겼다. 에릭이었다.</p>
<p>“움직이지 말고 더 누워있는 게 나을 거야.”</p>
<p>총으로 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걱정해 주는 듯한 모습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 표정을 알아챘는지 에릭도 손을 내려 놓았다. 에릭 너머로 쟈크와 다른 마로지 대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p>
<p>전투로 어지러웠던 공간은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연구 시설의 모니터를 바라보는 에린 너머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p>
<p>“뭐가 어떻게 된 거지?”</p>
<p>내 물음에 에린이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에릭을 흘깃 보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p>
<p>“왜 저들이 살아있어서 기분 나빠? 하지만 난 너희들이 될수록 많이 살아 있는 편이 좋으니까.”</p>
<p>“네가 빨아 먹을 것들이 부족할까 봐?”</p>
<p>“그런 이유도 있겠지. 근데 내가 흡혈귀나 뭐 괴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p>
<p>에린이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p>
<p>“사실 나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몰라. 냉동 캡슐에서 깨어나면서부터의 기억뿐이고 그 뒤로는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 행성을 이용해 볼까 하는거고.”</p>
<p>“저 자들은 또 누구지?”</p>
<p>“응 여기 연구원들이야. 보르조이 녀석들이 가둬두었던 것을 풀어줬더니 바로 내 쪽으로 돌아서더군.”</p>
<p>그 때 연구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에린에게서 위성 레이져의 좌표 측정기를 받아서 사라졌다.</p>
<p>“목적이 뭐지? 임무는 끝났으니 여기서 이럴 필요 없이 돌아가야 하잖아.”</p>
<p>“아! 이 행성이 어떤 곳인지 너는 아직 모르지!”</p>
<p>에린이 이렇게 말하고는 3차원 홀로그램 모니터를 만지작거리더니 행성의 모습이 담긴 3차원 모델을 출력시켰다. 지하로 무수히 많은 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처음에는 그것이 이 행성의 모습인지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 위성 레이저의 좌표 측정기를 들고 갔던 연구원을 손짓해 부르더니 설명을 부탁했다.</p>
<p>“음.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 행성은 수명 30년의 유기 연산 장치 입니다. 쉽게 말해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데 기존의 컴퓨터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p>
<p>“유기 연산 장치라니? 그게 뭡니까?”</p>
<p>“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컴퓨터죠. 실제로 살아 있는 겁니다.”</p>
<p>살아 있다는 말에 놀라 남자를 바라보자 연구원이 총격으로 부서진 창을 손으로 가리켰다. 밖에 세워져 있던 기둥들이 천천히 안전장치로 보이는 것을 풀더니 기둥 옆에서 푸른 빛의 수조가 열매처럼 솟아 나왔다. 기둥 하나에 수 백, 아니 수천 개의 수조가 매달려 있는 모습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 수조 하나에는 뇌가 들어있었는데, 그 크기나 모양이 흡사 인간의 뇌와 비슷했다.</p>
<p>“이게 작동 중인 모습입니다. 지금까지는 수면 시간이라 잠을 자고 있었죠. 이 행성에는 이 규모의 단말들이 셀 수 없이 많이 퍼져있습니다. 저 뇌들을 유전자 조작으로 돼지를 이용해 만들어 낸 인간의 뇌 입니다. 생물학적으론 말이죠. 뇌를 제거한 돼지들을 분해해 양분으로 주입하고 적당한 자극 물질을 투여해서 통제하고 신경 전달 물질로 가상의 집단의식을 유도하면 수 많은 가능성이 생겨나게 됩니다.”</p>
<p>남자의 말투에 언뜻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p>
<p>“행성 전체에 저런 게 퍼져 있다는 말이요? 대체 무슨 목적으로?”</p>
<p>“목적이라뇨? 모르시겠습니까? 완성되어 원래의 생각대로만 움직인다면 이 행성은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행성만으로 우리가 풀지 못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진화하는 컴퓨터를 상상해 보십시오. 기아를 해결할 새로운 물질의 합성, 시뮬레이션을 통한 전쟁 예측, 그 외에도 기존에 불가능했던 것들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겁니다.”</p>
<p>“근데 왜 30년이 최대 작동 한계라는 거지?”</p>
<p>중간에 에린이 끼어들었다.</p>
<p>“네. 중간에 죽어가는 뇌들을 대체해서 새로운 뇌들로 진행이 되고 있지만 그 수명에 대한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p>
<p>남자가 말을 끊었다가 계속했다.</p>
<p>“저 뇌들을 통제할 것이 필요합니다. 원래는 컨트롤을 컴퓨터를 이용해 하려고 했으나 그것으론 통제가 힘들었습니다. 또 인간의 유전자 때문인지 저 각자의 뇌들이 공격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휴지기에 제멋대로 다른 뇌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다른 뇌를 향해 공포와 증오를 보내는 거지요. 그것이 원래의 수명보다 빨리 저 뇌들을 죽게 합니다.”</p>
<p>“음. 고마워요.”</p>
<p>에린이 연구원을 보내고 나자 내가 물었다.</p>
<p>“그래. 이 거대한 쓰레기가 어째서 네가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된다는 거지?”</p>
<p>내 물음에 에린이 의자에 앉아 조종실 탁자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말했다.</p>
<p>“난 이런 것을 원했어. 다른 자들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 권력을 의미한다고. 아마 이걸 만들었던 재단의 놈들도 그걸 노렸을 테고. 그런데 이렇게 허술하게 그걸 내놓고 있다고. 이걸 손에 넣으면…… 생각만해도 즐겁지 않아?”</p>
<p>“네 흥을 깨고 싶지는 않지만 이렇게 허술한 이유를 모르겠어? 재단은 이 행성을 폐기한 거야. 원하는 성과가 없으니까. 죽은 정보원은 자기가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캐낸 줄 알았겠지만. 너라면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을 지키는 데 이렇게 허술하게 저 정도의 인원만으로 유지하고 있겠어?”</p>
<p>내 말에 순간 에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눈은 어느 때 보다 반짝였다.</p>
<p>“그런가? 그런데 난 벌써 결정했어. 내가 갖기로.”</p>
<p>에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미소지었다.</p>
<p>“벌써 GPC 에는 내 가짜 신상 정보를 문건인척 전송했고, 궤도의 수송선은 아까 내가 건넨 위성 레이저 무기로 파괴할 거거든. 마로지는 전멸인 거지.”</p>
<p>“GPC는 그렇다 쳐도 OTC는 보르조이가 당한 것을 알면 가만 있지 않을 텐데.”</p>
<p>“그거야 GPC와 OTC 사이의 문제지 여기엔 신경을 쓰지 않을 걸.”</p>
<p>“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p>
<p>그녀 멋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연구원 들도 에릭도 그녀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들 모두 최면에라도 걸린 듯 고분고분 에린의 명령을 따르고만 있었다.</p>
<p>“거래를 했어. 에릭과 저 들과는 말이야. 수명이 30년인 뇌에 네가 흡혈귀라고 생각하는 내 유전자를 이식하면 어떻게 될 지 저들도 궁금해 하더라고. 그리고 못 들었어. 저 뇌들을 통제할 게 필요하다잖아. 여왕이 필요한 거라고!”</p>
<p>에린이 이렇게 말하고 웃는 동안 난 내가 그 때 누굴 겨누었었는지 기억해냈다. 반사적으로 권총 홀더에 손을 가져간 내 모습을 바라보며 에린이 웃고 있었다.</p>
<p>“자 이제 너와 거래할 차례군. 다른 친구들하고는 적당한 거래를 했지만 아쉽게도 너와는 적당한 거래 거리가 없어서 몇 번이나 살펴줬는데도 결국 목숨으로 거래할 수 밖에 없겠군.”</p>
<p>빈 권총 홀더에서 사라진 내 권총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날 바라보는 동안 난 다시 바닥이 꺼지며 내 몸이 깊은 구덩이로 떨어지는 느낌에 작게 몸을 떨었다.</p>
<p><strong>끝</strong></p>
<blockquote><p>억지로 끝까지 왔습니다만 그래서 그런지 여기저기 구멍이 많습니다. 왜 시작을 했을까 싶은 글이라 다음에는 어떤 걸 써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p>
</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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