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래 '장편소설' 글모음

자사(紫蛇)

2007년 3월 19일 월요일

오랜만에 구름이 걷히어 밝은 햇살이 고개를 내민 날 황제는 창 밖으로 얼마 전의 화재 때문에 시커멓게 그을린 운하궁 한 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날이 밝아선지 타다만 기둥이 더욱 흉물스럽게 보였지만 황제는 마치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십수 명의 인부들이 재투성이가 된 채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모양을 바라보던 황제는 픽 하고 짧은 웃음을 흘리더니 몸을 [...]

추가비문

2007년 3월 15일 목요일

추가비문 해가 서산마루에 뉘엿거리자 쉴 곳을 찾으려고 말을 재촉하던 희문이 길 한쪽에 서 있는 이정표에서 상양이 가까웠음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려 마차 안의 희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양이 멀리 않았으니 쉬지 않고 간다면 내일 새벽 즈음에는 추가비문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구만.” 그 말에 희연이 마차 밖을 잠시 내다보는 듯 하더니 말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길 [...]

또 다른 여행의 출발

2007년 3월 11일 일요일

또 다른 여행의 출발. 여관에 딸린 식당에 식사를 하려고 들어선 순간 자신들을 향한 수상한 눈빛에 세 사람이 잠시 멈칫했다 자리에 앉았다. 양조웅은 자리에 앉자마자 입구 쪽에 서서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저 자가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수상하던데.” 조웅이 이렇게 말하더니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맞은편에 앉았던 세향이 그의 손목을 잡으며 [...]

과거로부터의 …….

2007년 1월 21일 일요일

과거로부터의 ……. 멀리 손유책의 집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량이 반가운 표정으로 마차에 앉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사량의 말에 희문의 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 “말들도 많이 지쳤을 텐데 잘 됐군.” 희문의 말을 듣고 희연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마차에 올라탄 뒤 그의 얼굴을 처음 바라보는 것 같 은 느낌이 들었다. 의식적으로 피한 것은 아니었지만 웬일인지 [...]

살육을 아는 자

2007년 1월 20일 토요일

살육을 아는 자 강 양진과 이 막우가 하곡에 들어선 것은 백형을 넘은지 닷새가 되는 날이었다. 양진이 옷차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로 사람 눈길이라도 끌려는지 하곡 성문을 넘자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 하나가 두 사람을 수상하게 여겼는지 잡아 세우려 하다 눈에 천을 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맹인이라 생각했는지 그만 두고 말았다. 양진의 팔에 달린 커다란 쇳덩이를 봤더라면 [...]

핏자국만큼 흐릿하게.

2007년 1월 19일 금요일

핏자국만큼 흐릿하게. 산새 소리마저 상쾌한 아침, 하진이 작은 짐을 짊어지고 방에서 걸어 나왔다. 새로 지어 입은 옷이 아침 햇살 때문인지 반짝이는 것 같았지만 그의 얼굴은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어두웠다. 깨끗하고 반듯하기만 한 새옷이 불편한지 어깨를 한 번 움직여 보다가 통증을 느꼈는지 이를 악물었다. 이를 악문채 잠시 그대로 멈춰 통증을 삭이던 하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

부패와 잠식, 정신과 육체

2007년 1월 16일 화요일

한세림의 방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어둠이 자신의 살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막아 주기라도 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더 이상 밝은 곳에 나설 마음이 없었기 때문인지 그는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그렇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이대로 몸이 완전히 썩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런 세림이 손톱이 다 빠져버린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칼날을 [...]

칼날의 첨단에는 무엇이 있는가.

2006년 12월 5일 화요일

군운 동쪽으로 삼일을 가면 하늘을 떠받치는 듯 우뚝 솟은 두개의 봉우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신이 장난이라도 쳐 놓은 듯 형제처럼 솟은 두 개의 산은 흑과 백, 선과 악을 상징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모습이 달랐다. 북쪽에 솟은 산은 풀 한포기 찾아 볼 수 없는 바위산으로 사시사철 빙설에 뒤덮여 하얗다 못해 푸르른 빛을 발하며 남쪽의 산보다 조금 [...]

그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2006년 12월 4일 월요일

불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안에서 눈을 뜬 하진은 잠시 그대로 벽에 기대어 앉아 문 옆에 세워져 있는 흑요를 바라보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어스름한 달빛에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진의 눈은 흑요 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저 검을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 문득 하진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희문의 말 대로 염라의 냄새를 맡고 도끼를 든 그 [...]

인형의 칼날

2006년 11월 10일 금요일

인형의 칼날 군운의 구름이 여전히 운하궁의 하늘을 뒤덮은 어느 오후, 황제는 술에 취해 가희의 부축을 받은 채 침소에 들어서고 있었다. “폐하! 약주가 과하신 모양이어요.” 가희가 교태 섞인 미소와 함께 말하자 황제가 흐릿해진 눈으로 손을 좌우로 크게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더 마셔야지. 껍데기뿐인 황제가 할일이 그것밖에 더 있겠느냐” 황제가 술 취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가희가 흠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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